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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Feb 07. 2024

배우고 싶은 가치들: 열정, 자유로움, 친절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교수들 2”


대학원 지원 후, 결과를 기다리는 것에 지쳐 결국 연재를 계속하지 못했다. 다행히 합격증은 얻었다. ‘사학과 학생’이라는 정체성은 찾았다.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마음 먹은 것처럼 잘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지난 번 쓰다가 멈춰버린 글을 살폈더니 여러 교수들을 만난 이야기였다.



세번째, 기타 치는 교수


‘캐나다까지 왔는데, 어떻게 캐나다 역사를 맛보지 않고 갈 수 있으랴?’라는 감상적인 생각으로 캐나다사(史)를 수강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점에서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캐나다사를 들었던 이유라 함은 단순히 북미 역사 과목 중 하나를 이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사를 먼저 맛보았는데, 온갖 잡다한 과제들이 많아서 얼른 수강포기를 선택했었다. 어차피 긴 시간이 흐른 후,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미국사 수업조교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사를 수강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해 아쉬울 것도 없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계절학기에 열린 캐나다사를 들으러 여름 내도록 학교를 꾸역꾸역 나갔었다. 눈에 띄는 점 없는, 그저 그런 계절학기 강좌였다. 세 달이 조금 넘는 강좌는 특별할 것이 없는 커리큘럼을 따라가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북미에 정착했던 것, 캐나다라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과정 등에 대한 내용 말이다. 본디 개론 수업은 아주 큰 뼈대만 잡기 마련이다. 계절학기는 주로 박사과정을 막 마쳤거나 박사과정을 마무리해가는 대학원생들이 종종 맡았는데, 내가 들었던 캐나다사 개론을 담당한 교수도 그랬다.


이 강좌는 두 명의 교수가 수업을 격주로 나눠서 수업을 맡으며 진행했는데, 첫 날 수업에서 아주 젊은 교수 두 명이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맞다. 그가 바로 ‘기타 치는 교수’였다. 그 젊은 교수는 30대를 막 넘었던 것으로 보였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순수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딱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날은 이 젊은 교수가 어느 날 기타 연주를 해준 날이다. 그의 전공은 캐나다 원주민 역사, 그 중에서도 그들의 음악에 관련된 역사였던 것 같다. 캐나다 원주민 역사 부분을 다룰 즈음에, 그 젊은 교수는 캐나다 원주민이 많이 사용하는 기타로 학생들 앞에서 연주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교수의 공연은 3분이 넘도록 이어졌는데,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서는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던 학생들도 미니공연이 시작되자 어색함을 조금 풀었다. 강의실을 가득 채우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공연이 끝날 즈음, 모두들 다시 어색한 미소로 돌아왔다. 다들 그 표정들에 걸맞게 어색한 박수를 쳤다. 눈을 감고 차분한 표정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던 교수는 공연을 끝낼 즈음에는 무척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지금 나의 나이는 그 시절 그의 나이와 비슷할 것이다. 같은 나이대가 되어보니, 그가 보였던 열정이 부럽고, 열정을 내뿜을 수 있는 용기는 더욱 부럽다. 나는 내가 하는 것에 그만큼의 열정을 갖고 있을까? 갖고 있었을까? 그리고 타인들에게 보일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네번째, 동유럽에서 온 노교수


토론토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사는 곳이다. 물론 토론토 내의 여러 대학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젊은 교수들의 이야기였다면, 이번에 소개할 사람은 10년 전에도 이미 나이가 지긋한 노교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 그를 ‘할아버지’라고 칭하겠다. 언제나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아주 인자했다. 할아버지는 에스토니아라는 먼 나라에서 온 분이었다. 아주 센 동유럽 억양이 흥미로웠다. 이따금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었는데, 사실 큰 단점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의 영어실력으로는 북미식 억양도 종종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참으로 열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은 한자동맹 (Hanseatic League – 발트해 연안의 북부 독일과 북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유럽의 넓은 지역까지 확장했던 무역 동맹)이라 불리는 영역을 다루는 유럽사 과목이었다. 어느 날 수업에서 학생 하나가 무슨 말을 하려다 주저하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내 기억이 흐릿하지만, 결국 “논란의 여지가 있을 법한” 발언도 아니었다. 당시 그 학생에게 할아버지가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했던 말만큼은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대학은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 소련에서 보내고, 그 사회 특유의 폐쇄성에 넌덜머리가 나서 자유로움을 강조했기 때문인지, 그것과 별개로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대학’이라는 기관에서 오래도록 근무하며 진절머리를 쳤기 때문인지, 그 발언의 배경은 아직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내가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아 은퇴를 했다. 은퇴하면 자신의 고국 에스토니아로 돌아가서 등대지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 어느 항구에서 행복한 노년을 즐기고 계시기를. 아무튼, 그의 한마디는 내가 대학의 역할을 떠올릴 때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가치가 되었다. 대학에서 근무를 하는 행운이 따른다면 나도 학생에게 어떤 말이든 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을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열린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나는 내가 하는 생각을 자신있게 표현할 용기가 있을까?



다섯번째, 친절한 대학원생교수


대가와 보수를 바라지 않고 친절과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라틴어 초급 1’을 마치자마자 얼른 ‘라틴어 초급 2’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다 – 다행히 “수강신청 암시장”에는 갈 필요가 없었는데, 보통의 경우 초급 2는 초급 1을 듣지 않고는 수강신청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초급 1에서 라틴어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더이상 라틴어 강좌에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급 2 수업을 가르쳤던 사람은 이전 편에 소개했던 ‘노래 부르는 교수’와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보였던 활기찬 성격과는 아주 반대였다.


교수라고는 하나, 엄밀히는 박사과정을 마쳐가는 대학원생이었다. 지겨운 라틴어 문법수업은 담당교수의 차분한 성격과 합쳐져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뿜었다 – 시너지 효과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초급 2 수업이 진행되던 교실은 일주일에 두번씩 수면실이 되었다. 다만 성격이 차분했을 뿐이지, 결코 모난 성격이 아니었다. 마치 기계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듯, 라틴어 문장을 뜯어서 분해하고 다른 순서로 조립하는 연습을 할 때면 학생들이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전혀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알려주었다. 질문을 던지는 것에 부담이 적어지니, 라틴어 문법을 알아가는 것에도 재미를 느꼈다. 질문하는 것에 눈치를 주는 교수였다면 라틴어는 초급도 채 끝내지 못하고 진즉 포기했을 것이다.


친절과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고귀한 일이라고 앞서 말해두었는데, 특히 그 친절과 선행을 받는 사람일 때는 감사함을 넘어 고귀한 것이라 느낄 수 있다. 초급 2 를 들을 즈음하여,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추천서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이 써주는 추천서는 쓸모가 없을 것이라며 미안함을 표하며 거절했다. 다만, 지원시즌이 가까워졌을 때, 자기소개서나 이력서 같은 것들을 수정해야 할 때 언제든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며, 실제로 내가 지원서류를 한 번 읽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약속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내 어설픈 영어로 쓴 글도 첨삭해주었다. 설사 그는 작은 도움을 베푸는 정도였을지 모르나, 나로서는 너무나 큰 도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대학원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심적으로 크나큰 지지가 되었다. 그에게서는 친절과 선행을 베풀고 살아야함을 배웠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살았을까? 혹여나 그렇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대가나 보수를 바라지 않고?





토론토 근교


대학을 다닐 때, 앞서 말한 다섯명의 사람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내게 중요한 가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도움들도 많이 주었다. 그 당시에는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했던 20대 초반이었다. 그런 나를 여러모로 그리고 진정으로 성장시켜 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어쩌다 토론토에 정착하게 되었던 나에게 20대 초반이라는 젊은 시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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