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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Feb 16. 2024

나의 고질병, 조급증

2015년 가을

“대학원 진학 프로젝트”


“이제 겨우 24살인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마”

교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 말이 나오기 바로 전에 들었던 “추천서를 써주지 못할 것 같다”는 말만 귓가에서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24살이면 매우 늦은 것이다. 게다가 한달 뒤에는 한국식 나이 셈법으로 26살이 되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조급했다.




대학교를 입학할 즈음부터 나는 항상 ‘얼른 대학교를 졸업해서 최대한 빨리 대학원에 갈거야’라는 생각을 했었다.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입버릇처럼 그저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던 덕분에 석사만 3개를 받아냈다. 내 주문이 중복결제가 된 것이다). 아무튼 매일같이 주문을 외우긴 했어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역사를 공부할 지도 정해진 것이 없었으며, 어느 나라에서 할 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대학을 마쳐갈 즈음에 어떤 분야를 하고 싶은가에 대해 대충이나마 정해볼 수 있었다. 피부로 느꼈던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대학을 졸업할 즈음 들었던 홀로코스트사(史) 수업은 내가 어떤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급한 성질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다리는 걸 도통 잘 해내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다. 어학연수를 시작했을 때도 ‘월반’을 해서 빨리 이 과정을 끝내는 것이 목표였다. 대학과정도 빨리 마치려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4년보다 조금 더 걸렸다. 여하간, 대학원에 가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파리)




3-4년차가 지나가고 있던 시절에는 대학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다. 느리긴 했어도 평점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이수해야 할 교양 강의들을 해치우고 나니, 내가 듣고 싶은 강의들로 시간표의 대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물론 튜토리얼 수업이라 불리는 토론 수업이 많이 사라진 것도 아주 흡족했다. 모든 것이 불안할 정도로 순탄했다. 그래도 그 기세를 몰아 대학원 원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던지, 나는 토론토에 더 있는 것이 그렇게도 지겨웠고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정말 내 고질병이다. 지금까지 몇몇 학교를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옮겨 다녔을 뿐 아니라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다. 물론 어떤 때에는 내 자의가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택지가 있었다면 새로운 곳을 가려고 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영국의 몇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뭉게뭉게 피었던 것, 영국의 석사과정은 1년이면 끝낼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영국에서의 석사를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물론 프로그램마다 그 성질이 달라서 1년짜리, 2년짜리 등 여러가지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1년이면 끝낼 줄 알고 갔는데, 석사 학위만 몇 개를 가지게 되다니.


남들보다 시간이 2배로 빨리 흐르는 것도 아닌데, 분초를 다툴 정도로 급했던 것도 아닌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인양 원서를 준비했다. 여러가지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자기소개서와 추천서 몇 부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둘 다 골머리를 적잖이 썩혔다. 자기소개는 초등학교 새학기에 “안녕, 내 이름은 OOO야. 잘 부탁해” 밖에 해본 적이 없었고 (이런 형식적인 것도 초등학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어떻게 내 소개를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꾸.엮.꾸.엮 적어나갔다 – 어떤 수업이나 어떠한 개인적인 경험이 특정한 학구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썼고, 이어서 어떤 필드를 공부하고 싶은 지 써내려갔다. 학교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어떤 교수에게서 배우고 싶은가, 어떤 대학원 수업을 듣고 싶은가, 이런 것들 말이다. 정작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언급하지 않았던 교수의 지도 하에서 공부했으며 자기소개서에서 언급했던 대학원 수업들 중 몇몇은 해가 바뀌면서 없어졌다. 어리숙하고 유치해 보이는 다짐들의 연속으로 불과했던 나의 자기소개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첨삭될 수 있었다 (지난 번 이야기했던 라틴어를 가르쳤던 대학원생교수는 아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추천서는 다른 느낌의 골치 아픔이었다. 본인의 학업능력을 상세히 써 줄 수 있는 사람을 추천인으로 등록하는 것이 권고되는데, 자신이 대학원생이고 (큰 문제가 없다면) 자신의 지도교수와 친한 몇몇 교수들에게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절대 보장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부생으로서는 누구에게 요청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못해도 40-60명 규모의 수업에서 나는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추천서를 요청하며 이메일을 돌렸을 때, 감사하게도 흔쾌히 써준다고 하신 분들이 계셨다. 그 중 한 분은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에스토니아에서 온 노교수 (a.k.a ‘할아버지’)였다. 추천서를 써 줄 뿐만 아니라, 자기소개서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던 분도 계셨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학원 원서 제출조차도 못했을 것인데, 결국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았을 때는 어째서 “내가 스스로 잘해서”라고 생각을 하며 우쭐했던지. 참으로 오만했다.




대학원 지원에 왜 그리도 서둘렀던지.

나보다 일찍 학업을 마치고 대학원 등지로 떠나던 사람들을 볼 때면 내가 한참 뒤처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졸업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졸업 이후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째깍째깍 지나고, 그것이 나를 옥죄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여유가 없었다. 왜 그리도 서둘렀던지.



여유


2023년 5월


긴 시간이 흘러 내가 수업조교로 일하던 즈음에 8년 전 나를 타일렀던 교수의 말이 이해되었다. 나의 수업에는 이따금 한국인 학생들도 있었는데, 21살의 한 학생이 상담을 요청했다.


그가 수심이 가득 차 보이는 표정으로 건넨 말은, “친구들은 모두 졸업 후 취직도 “멋진” 곳으로 했는데, 나는 뒤처지는 것 같다. 게다가 곧 졸업인데, 나는 어떡하면 되죠?”였다.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절대 늦은 것도 아니고, 패배감 같은 것도 갖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지금부터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 되고, 못 찾더라도 졸업 후에 얼마든지 찾을 기회는 있을 것”이라며 걱정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제 겨우 21살인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마지막 말로 상담을 마무리했다.

그 학생에게 말하는 것이었는지, 8년 전 내게 말하는 것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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