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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Jun 03. 2022

[영화] 굿바이 레닌: 기억과 정체성

“고향을 잃다, 기억을 지키다."


소개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가? 단순히 살던 지역만 불쑥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시절 희노애락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지 않는가? 그렇게 수 많은 기억들이 이어지고, 기억이라는 조각들이 모인 '과거'라는 큰 조각은 내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타인들과 함께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공동체의 기억이 되고, 나아가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과거와 기억이 사라지고, 나아가 정체성이 부정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독일 재통일 이후 구 동독 주민들이 그러했다. 1990년에 두 개의 독일은 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 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그러나 새로운 재시작을 알리는 희망찬 구호가 무색하게도, 구 동독 주민들에게 새로운 재시작은 쉽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을 너머 재통일의 기쁨도 잠시였다. 동독 시절의 기억을 포함한 동독의 대부분은 버려졌다. 그리고 종종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는 "구식"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물" 따위로 여겨졌다. 물론 "세련되지 못한" 구 동독민들도 함께 말이다. 구 동독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를 몸소 느끼게 된다. 통일된 독일에서 구 동독민의 40여년 세월은 사라졌고, 또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2003년에 개봉한 '굿바이 레닌'은 독일 재통일 이후 동독 출신의 어느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동독은 무너졌고 두 독일은 통일을 맞이했다. 재통일을 알아서는 안되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지극한 사랑과 당신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아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아들의 사랑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너머 동독민의 기억과 정체성을 향한 사랑으로도 확장된다. '굿바이 레닌'은 재통일 직후의 구 동독민들이 가졌던 복잡한 감정을 소재로 우리에게 '과거, 기억, 그리고 잃어버린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러한 것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의 개인 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도 생각하게끔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구 동독민들의 일상과 복잡미묘한 감정은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끝 무렵엔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제 아들 알렉스는 그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를 어떻게 지켜내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줄거리


애인 때문에 서독으로 탈출한 아버지 덕분에, 크리스티아네, 알렉스, 그리고 누나 아리아네의 집은 뒤숭숭하다. 충격에 어머니는 실어증을 앓지만 금세 회복하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세 가족은 나름의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동독 붕괴 직전이었던 1989년의 어느 날에 벤치에 앉아서 맥주나 마시는 알렉스의 모습으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독 탄생 40주년 기념 준비가 한창이지만, 어쩐지 동베를린의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열성적인 사회주의자 크리스티아네는 기념 행사에 초대받지만, 마침 그날 저녁 일어난 시위에서 알렉스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사회주의자 어머니의 당성 덕분에 풀려난 알렉스는 병원으로 곧장 향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어머니를 마주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조국은 사라진다. 두 개의 독일이 통일을 맞은 것이다.


          어머니는 깨어나지만 알렉스는 의사로부터 절대 어머니가 놀라서는 안된다는 말을 듣고는, '절대 동독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서는 안된다'라고 다짐한다. 혹여나 뉴스나 신문이라도 볼까 싶어 얼른 어머니를 집으로 옮긴다. 누나가 꾸며 댄 "서방세계스러운" 인테리어를 싹 다 치워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어머니를 위한 알렉스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어머니가 학교에 근무할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을 불러 옛 동독 시절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근무하던 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했지만 이젠 술꾼이 되어 버린 아저씨를 포함해 여러 구 동독 시절 이웃들을 불러모아 동독을 연출한다. 이것 뿐이랴. 이젠 구하기도 쉽지 않은 온갖 동독 식품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 스프레발트 피클, 모카 픽스, 글로부스 콩 등 종류도 많다. 알렉스에게는 어머니의 기억을 망치지 않을 동독 음식들의 '상표'면 충분하기에, 동독 음식 상표가 붙은 병에 열심히 음식을 옮겨 담는 것은 그의 일상이 된다 -- 새롭게 가진 텔레비전 방송 판매 영업직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리아네는 "집안 꼬락서니가 왕년의 사회주의자 클럽이 됐다"라며 쏘아대지만, 어머니가 건강만 되찾는다면 알렉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단조로운 생활에 지친 어머니는 혼자서 집 밖을 나가보기로 한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온갖 통일의 흔적이 가득하다. 통일 직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랐던 나치역사를 대변이라도 하듯 엘리베이터에 문에는 스와스티카 (나치를 상징하는 심벌) 낙서가 있다. 건물을 나서니 "나의 나라 동독"은 아무 곳에도 없다. 서독에서 이사 온 이웃이 인사를 하는가하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 "버젓이" 있고, 길거리엔 이케아 광고와 BMW 차량들이 즐비하다. '낫과 망치', '공산주의 정치인 초상화들', '트라반트 (동독 국민자동차)' 따위는 오간데 없다. 그리고 하늘엔 반으로 잘린 레닌 동상의 상반신이 폐기 처분이라도 되는지 헬리콥터에 묶여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 마치 크리스티아네에게 인사라도 하듯.



          동독이 "서독 난민을 받아들였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는 알렉스와 아리아네에게 크리스티아네는 그들을 위해 집 단장도 할 겸 오랫동안 가지 않았던 오두막집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당을 싫어했던 아버지는 서독으로 탈출할 기회를 얻었고, 모두 함께 가려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네는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잘못될까 탈출을 포기했다며, 그 결정과 그리고 지금까지의 거짓말을 미안하다고 고백한다. 혼란스러운 알렉스는 금세 깨닫는다. 어머니는 자신과 누나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삶을 바쳤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다시 심장마비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주소를 알게 된 알렉스는 아버지에게 죽어가는 어머니를 꼭 만나기를 요구한다. 자신도 알아보지 못했던 아버지이지만 알렉스에게는 상관없다 -- 알렉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를 위한 동독의 기억 한 조각이었으니까.


          영화는 마지막에 이른다. 재통일 1주년 기념행사를 어머니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알렉스는 동독의 주도로 통일이 되었다는 것을 연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통일 이후 어느 날 만났던 자신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동독 우주비행사 지그문트를 만난 알렉스는 새로운 "동독 서기장"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한 때 러시아 우주선을 탔지만 이제는 러시아제 자동차 (LADA)를 타는 수 많은 택시기사 중 하나인 지그문트이지만, 여전히 알렉스의 눈에는 "동독의 영웅이고 상징"이다 -- 이젠 본인이 아닌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한. 연출은 성공리에 진행되고 어머니는 만족하는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그 날 밤 도시를 뒤덮는 폭죽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눈을 감는다. 알렉스는 화장된 어머니의 유골을 자신이 만든 로켓에 넣고 하늘로 쏘아올리며 어머니를 배웅한다. 그리고 사라진 어머니의 동독도 함께 배웅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기억과 정체성


영화는 알렉스가 어머니를 지키고자 하는 방식을 다양한 코믹한 장면들 -- 가령 알렉스가 스프레발트 피클에 집착한다든가 혹은 가짜 방송을 만들어낸다든가 -- 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코미디'로 분류된 영화치고는 가슴 아려오는 알렉스의 노력에 마냥 웃을 수가 없다. 도리어 가슴이 먹먹해지기 일수다. 영화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과 그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두 사람 사이의 희생과 사랑은 '거짓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머니는 거짓말을 지어낸다. 아버지 탓을 하며 동시에 열성적 사회주의자가 됨으로써 자식들을 지켜냈다. 그 세월동안 '동독'은 어머니의 기억과 정체성이 된다. 자식들을 위해 "당에 대한 충심 넘치는" 사회주의자가 됐어야 했던 그녀의 삶은 동독이라는 곳이 없어지면 더이상 설 곳이 없다. 어른이 된 알렉스는 그것을 깨닫고, 동독은 붕괴되었지만 어머니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자신과 누나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알렉스는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과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동독'에 엮인 어머니의 정체성을 하얀 거짓말을 통해 보호해낸다.

 

          크리스티아네와 알렉스를 중심으로 영화는 진행되지만, 조연으로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을 살펴본다면 통일 직후 구 동독인들의 기억과 과거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에 관련한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하룻밤에 "실향민"이 되고,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그리고 정체성은 부정되기까지 한다. 영화는 물리적 공간의 고향보다는 감정적 공간이라는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몇 십년을 살아왔던 집에 산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새로운 독일의 주소로 새로 명명된 "낯선" 집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물리적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모든 기억과 정체성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회상되어서는 안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이 부정되는 것은 동독의 모든 것들은 부정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음식은 서독, 네덜란드, 미국 등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며 동독의 음식은 온데간데 없다 (알렉스가 눈에 불을 키고 찾아도 겨우 구할 뿐이다). 구 동독민들 자체도 부정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는 직장을 찾아야만 했고, 과거의 정체성은 무시당하고 부정당하기 일수다. 그들은 새로운 독일인 -- 혹은 "서독인" -- 이 되어야 했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동독적인 것들은 몸과 마음에서 지워내야 했다. 알렉스가 동독의 "유물"들을 찾아 나서는 장면에서도 동독 신문, 제복, 훈장 따위들은 길거리 시장에서나 팔리고 있다. 술에 의지해 사는 한 때 잘 나가던 교장 클라이프라트도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긴다, "우리는 한 때 가치 있었다"라고. 이웃들도 어머니가 재통일을 모른다는 사실에 "운이 좋군"이라고 반응을 한다. 그들은 그렇게 고향을 잃고, 자신들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일생을 모은 돈을 서독화폐로 바꾸지 못한 알렉스는 욕을 퍼붓다 결국 종잇조각이 된 돈을 공중에 흩날리며 "어머니가 모은 돈은 서방 바람에 다 사라져 버리고 있다"며, "어머니의 일생"이 공중에서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모습에 씁쓸함을 드러낸다.


          씁쓸함에 빠져 있을 때, 알렉스의 "동독 재연하기" 노력 덕분에 어머니 뿐만 아니라 구 동독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금 즐기게 되기도 한다. 교장이었던 클라이프라트도 양복을 차려입고 교장 흉내를 낸다. 어머니의 오랜 이웃인 쉐퍼 아주머니도 동독 시절 어머니와 함께 진정서를 내던 것을 다시금 하며 알렉스에게 "꼭 옛시절 같다"며 즐거워한다. 지그문트라는 조연은 이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동독 영웅에서 이제는 현실에 적응해 소시민이 된 그는 영화 말미에 "새로운 동독 서기장"으로 등장하고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연기한다. 그렇게 그는 과거의 "가치있었던 그리고 분명한 정체성을 가졌던" 그 때 그 시절을 보여준다. 그가 나오는 가짜 방송에서 동독의 국가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마치 구 동독인들이 잃어버린 기억과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 혹은 되찾은 -- 것으로 연출된다.


          '굿바이 레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모성애와 지극한 사랑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구 동독민들이 잃어버렸던 그리고 잊어야만 했던 기억들과 정체성을 조명한다. 통일 이후 오갈 곳 없고, 마음 둘 곳 없어진 구 동독민들을 보자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의 정체성을 -- 어머니로 대표되는 동독인들의 정체성 -- 사라지지 않게 동분서주하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코믹하게 그려지는 그의 노력에도 마냥 웃을 수 없다. 그렇기에 '굿바이 레닌'의 한 장르가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감상을 끝낼 때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동독민들의 상실감은 실제 역사에서도 일어났다. 통일된 독일에서 동독민들은 차별되는 시선을 받기 였다. 법적으로나 통일이 이루어졌던 것이지, 실제적인 통합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독일은 통합을 위해 사회적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의 많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다양한 노력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늘날 베를린의 신호등에서   있는 '암펠만 (신호등 사람)'이다. 동독의 신호등에 쓰였지만 통일  "당연하게도" 버려졌으나, 사회/문화적 통합을 목표로 통일 정부의 주도로 암펠만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 넣게 된다. 동시에 암펠만의 재등장은 자격지심과 무시에 시달리던  동독민들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게 된다.  결과,  서독인에게는 통합의 진정한 의미를,  동독민들에게는 정체성을 되찾아 준다. 진정한 의미의 통일과 통합으로 한발짝 다가섰던 암펠만은 어쩌면 알렉스가 그토록 보존하려 했던 "동독에서의 기억과  동독민들의 정체성" 아니었을까?



 

          사람은 미래를 향해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지탱해내고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과 향수일 지 모른다. 다양한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각각의 공동체와 각각의 개인이 가지는 ‘고향’ 그리고 '기억과 정체성'은 어떤 모양새를 띄고 있는지, 가령 어떤 기억과 정체성은 무시되었는지 혹은 강조되었는지 등을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 사회 내에서 서로 간의 이해와 공존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도 돌이켜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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