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병정만 볼 테지만) 언제까지 갑이세요?

by 김서록

이런저런 콘텐츠를 보다 보면, '한국인들이 전반적으로 화가 나있다'는 의견을 접하게 된다.

특히 외국에서 장기 체류했던 사람들은 이를 더 강하게 느끼나 보다.


왜 화가 나 있을까?

욕구의 좌절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존중받고 싶고 배려받고 싶은 욕구.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상대방을 스캔하여 본인 입맛대로 판단한 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상대방을 모욕하고 굴종시키려는 사람과 얽히는 일도 생긴다.

나의 직업, 행정사도 마찬가지다.

전문자격사는 대부분의 고객보다 특정 분야의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기에

통상 ‘을’로 취급받는 서비스업이어도 ‘비교적’ 대우를 받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이스한 고객만을 상대하는 건 아니다 (... 휴)


그러나 인생이 흥미로운 점은 점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갑'이라고 항상 '갑'이 아니고, '을'이라고 항상 '을'이 아니라는 점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B상사의 사장은 비나이스(非Nice, Be nice)한 고객이었다.

기존 고객사였던 A상사의 상무를 통해 우리 사무소를 소개받아 연이 닿은 케이스인데,

전화로 견적과 절차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요구했다.

나는 B상사 사장에게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고,

서류를 확인한 뒤 필요한 내용을 해당 메일을 통해 주고받기로 했다.


통화를 마치고 몇 시간이 지나자 B상사에서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첨부 파일을 확인하여 추가 전달이 필요한 서류와 결제방법 등에 관한 내용을 회신했다.


B상사에서는 이후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뭐, 그러려니 했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더라도 다른 사무소를 따로 알아볼 수 있고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곳에 의뢰를 할 수 있으니까.

프로젝트가 연기되었다던지, 당장 의뢰할 필요가 없어졌을 수도 있다.

의뢰할 생각이 없는데 답신이 오는 경우는 희소하기에 수신확인 정도만 할 뿐이었다.



몇 주가 지났을까.

평소처럼 상담 전화를 받았다.

"행정사사무소입니다."


다짜고짜 성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어안이 벙벙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어디에서 전화 주셨을지요?"


성난 이의 정체는 B상사 사장이었다.

"나 B상사 사장인데,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업무가 하나도 안 되어있잖아!!!"


B상사?

매해 꾸준히 업무를 의뢰하는 A상사 상무님 소개였던지라 바로 기억이 났다.

"B상사에서 연락 주셨군요. 의뢰 확정된 내역이 없어 진행되고 있는 건은 없습니다."


그러자 언성이 더 높아진다.

“뭐요? 요청한 지가 언젠데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혹시 모르니 이메일 내역을 다시 한번 보고, 결제 내역이 누락된 건 없는지도 확인을 했다.

“보내주신 이메일은 7월 1일 14시로 최종 확인되며, 제 답신은 7월 1일 14시 10분으로 최종 확인됩니다.

결제 확인된 내역도 없고요. 만약에 답신 이메일을 발송하셨어도 시스템 문제로 발송이 안 됐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그는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아니! 그래도 전화를 줘야지! 바빠죽겠는데 진행을 안 해버리면 어떡해요?"

첫 통화 이후 자세한 내용은 이메일로 주고받자고 합의한 사람은 그였는데, 끝까지 내 탓이었다.


순간, 그동안 쌓아온 ‘고객 유형 분석 데이터’가 머릿속에서 촤라락 펼쳐졌다.

'삐빅- 해당 유형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잡음이 생김. 감당할 스트레스는 수임료 수준을 넘어섬. 삐빅-'

기껏 소개해준 A상사 상무님께 죄송했지만, 수임하지 않는 게 맞다는 결론이었다.

“사장님, 제대로 알아보지 않으시고 무작정 화부터 내셨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저희가 통화할 때 합의한 내용도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B상사 업무를 도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뭐요?”

“저희 사무소보다 더 적합한 곳에 의뢰하시길 바랍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하려 애쓰며 통화를 마쳤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더니, 갑자기 B상사 명의로 입금이 되었다며 알림이 왔다.

경리직원과 소통이 어긋나서 입금이 처리된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입금이 되어버렸으니, 환불을 해줘야 하는데…

B상사의 계좌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B상사와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고,

거기서 보낸 돈은 단 한순간도 사업자통장에 보관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참 별나긴 하다.

결국 은행에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사업자 계좌에 착오입금이 발견되어서요. 반환 처리 부탁 드립니다."


그렇다.

모르는 계좌로 잘못 송금을 했거나, 모르는 계좌로부터 송금을 받았다면

'착오송금 자금 반환 접수' 절차를 활용해 보자.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A상사 상무님이었다.

“행정사님, 안녕하세요. 일전에 제가 소개해 드렸던.. B상사 건은 어떻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물음에 왠지 면목이 없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삼켰다.

“상무님,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B상사 업무 건을 맡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

"아니, 왜요?"

자초지종 구구절절 얘기하기는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두 문장 정도로만 설명했다.

그는 탄식을 내뱉더니,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가 유독 불난 하루였다.

“행정사 사무소입니다.”

“아, 저…"

“네 말씀하십시오.”


쭈뼛거리던 그는 바로 B상사 사장이었다.

“저…B상사인데요.”


반환 처리가 된 걸 아직 알지 못했을까?

"네, 아까 입금 확인이 되었길래 반환 처리는 했습니다. 혹시 확인이 안 되어 연락을 주셨을지요?"

"아, 그러셨군요... 그렇게 하실 필요 없는데…

저... 아까는 제가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뭐지?

불같이 화내던 ‘손놈'은 어디로 간 걸까.

"그냥 저희 회사 업무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참...

말 몇 마디에 마음이 움직인다.

소개해 준 A상사 상무님 체면도 있으니 이왕 잘 마무리하는 게 좋을 거 같고.

그래,

맡아보자.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좀 풀리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송금하고 필요한 것들 준비해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B상사 업무 건은 잘 마무리했고, 지금도 거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

인생이 참 모르는 일이라고 되뇌게 된다.

당시 B상사 사장은 자신이 우리 사무소에 돈을 지불하는 만큼

당신이 갑이니 그 정도 성질(?)은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돈을 벌기 위해 상대방의 도 넘는 행위를 꾹 참아 내는 사람이 분명 있으니까.


나도 회사원일 때 이런 상황을 감내할 때도 있었는데

자영업자인 지금은 '손놈' 때문에 내 건강을 깎아먹느니

돈을 좀 덜 벌 지언정 '손님'에게 시간을 쓰겠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결국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는지 (또는 둘 수밖에 없는지)

누가 더 아쉬운 입장인지가 강자와 약자를 가른다고 본다.

그러나 강자라고 평생 강자이고 약자라고 평생 약자라는 보장은 없다.


그나저나, 이 에피소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아마 A상사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A상사가 주도하는 해외 프로젝트에 B상사가 합류를 원하는 입장이었고,

이를 위해 B상사가 회사 관련 자료를 준비하여 A상사에 전달하면

A상사가 이 자료를 해외 기관에 제출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A상사는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우리 사무소와 거래를 튼 이후로

업무가 끝나면 서로 감사 인사를 주고받곤 했는데,

이번에도 우리 사무소에서 맡으면 좋겠다고 B상사에게 소개했던 게

이렇듯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자 물밑대화가 이뤄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우리, 갑이든 을이든 서로 존중하며 살자고요;)




*Note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올린 게 벌써 2년이 되어간다니...

네...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이래저래 혼자만 글을 간직하는 기간이 길어졌어요.

올해 계획은 유독 거창(?)해서 자주는 못 올릴 수 있지만,

기다려 주신 분이 재밌게 읽으시기를 바라며 썼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P.S. 김서록은 제 필명입니다. 김서록 행정사 검색하면 안 나올 거예요.

수임이나 광고 목적으로 쓰는 거 아니니 업무 상담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2025. 04(APR). 20.

서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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