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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못하는 영역에 대한 열등감을 흘려 보내는 법


가끔 내 뇌의 어떤 인지 기능은 아직 미분화했거나 성장의 자극을 받지 못한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하는데 내게 특히나 낯설고 어색한 것들이 종종 있다. 최근에 강하게 느낀 것은 내가 겪었던 불편한 상황을 재연해 이야기하는 것과 음악을 듣고 가사와 음을 기억하는 것에 관한 능력이다.


나는 이런 머리가 없나 느꼈던 것들 대부분은 일상에서 따로 자극을 찾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연차 선생님이 신규 선생님과 함께 있던 방에 인계받으러 갔는데, 수술방에 다수의 의사와 간호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고연차 선생님이 내게 신규 선생님 흉을 큰 목소리로 봤다. 자기가 가르쳤는데도 기억도 못하고, 물어봐도 대답도 못한다고. 공부를 해왔다고 하면서 수술 스크럽 하는 거 보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 선생님은 신규 선생님의 프리셉터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모두 들리게 수술방에서 혼을 내고, 수술방 바로 앞 스크럽대에서 손 씻는데 또 흉을 보고 ... 어떤 고충에 얼추 공감은 해드렸지만 신규 선생님도 곁에 있어서 다 들리는데 참 난처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짧게 보아도 많이 서툴고 흐름을 익히지 못한 게 보이는 선생님이라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마주한 장면은 가르침을 주기 위한 배움의 장면으로 안 느껴졌다. 대체 이럴 때 현명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려웠다.


이 이야기를 수술실 동기랑 하는데, 말 하다가 그 흐름이 순간 끊기는 거다. ‘이야기의 요점이 뭐였지?’ 내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불명확해지면서 지금 글로 쓰는 것보다 훨씬 두리뭉실하게만 이야기 나눴던 것 같다. 동기에게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 어떻게 반응했고 그 결과는 어땠는지, 특히나 그 둘의 조합을 자주 만나는 내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 직장 고충과 관련된 이야기는 발화하던 중에 쉽게 맥락이 증발해버려서 스스로 이상하게 생각한다. 안 좋은 기억을 쉽게 휘발시켜버리는 건지, 나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기에 크게 이야기 소재가 되지 않았던 건지.


다른 하나는, 노래를 들으며 음과 가사를 기억하는 것. 어릴 때부터 최신 곡 보다 좋아하는 노래만 다운로드하여 반복해서 듣는 걸 좋아했다. 그렇지만 몇 년을 들은 노래라도 음을 흉내내거나 가사를 적어보려고 하면, 아주 일부만 기억난다. 어린 시절 노래를 별로 즐겨듣지 않아서 음악적 자극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는 동요 테이프 같은 건 없었고, 세계명작동화 테이프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TV를 즐겨보지 않았고 연예인에 관심이 없어 대중 가요를 몰랐을 뿐더러, 들리는 노래라고는 예전 아빠 차에서 들리던 트로, 고전 팝송 정도만 추억된다. 멜로디, 가사의 아름다움과 관련한 자극이 기억 상에서는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이야기를 이끌며 논점을 잡는 사람이 부럽고, 대중 문화에 대한 문화적 경험이 풍부하면서 이를 잘 기억하고 생활에 녹이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네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어서 그게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내 머리가 안 해본 것을 어찌 쉬이 하겠는가. 어릴 때부터 그런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고, 운 좋게도 다른 방면에 관심을 쏟아 사회적으로 적당히 기능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읽고 쓰며 학습하고 성찰하는 능력이나, 일상을 지루해하지 않고 음미하는 능력같은.


아마 내가 계발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는 경험의 시간과 폭이 곱절로 필요할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부분을 처음 만나자마자 흥미와 재미를 가지고 잘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자주 자극을 주고 시도해 볼 것이다. 게임 속에서처럼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경험을 사냥해다가다보면, 그래도 언젠가 레벨업은 하겠지. 모든 것을 잘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풍성히 녹여낼 수 있을 정도로 조화롭게 사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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