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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언제까지 못할 건데?

먼저 해낸 보통의 다른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를 속이기


대학 생활 중 타인에게 들은, 뼛속까지 새겨진 인상 깊은 두 문장.

"언제까지 못할건데?"와 "할 수 있는데 왜 안 합니까?"


첫번째는, 1학년 조별 과제 역할 분담을 위해 논의하던 순간이었다. 자꾸 역할을 미루며 자료조사도 PPT도 발표도 조장도 아무것도 맡으려 하지 않으려 했던 조원에게 답답함을 느낀 친구가 내뱉는다. 



"나는 안 해봤는데... 못 하겠어." 

"누구는 다 해봤고 하고 싶어서 하니? 언제까지 못할 건데?"


그때 느낀 그 통쾌함이란! 아는 것도 능력도 고만고만한 입학 동기들 사이에서, 과제의 퀄리티는 성실성과 관심의 여부가 결정했다. 다만 역할과 시기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대학생활을 하다보면 언제든지 역할은 바뀔 수 있다. 조원의 구성에 따라 내가 조사에 강할 수도, PPT나 발표에 강할 수도 있기에 모든 부분을 경험해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안 해봤기에, 못하기에 미룬다는 건 어불성설이리라. 무언가 해보지 않은 것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때, 씩씩한 그 한 마디의 질문이 지금도 나를 생생히 깨운다.


두번째는,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옛 간호대학 군기 문화에서 비롯된 한 장면이다. 200명이 넘게 들어선 대형 강의실 강단에 신입생 학생을 줄줄이 세워놓고 어떤 문구와 이름, 학번을 큰 소리로 말하게 했다. 그 큰 강의실 맨 뒤에 앉은 선배의 귀에 신입생의 목소리가 안 들리면, "다시."가 반복되었다. 몇 번의 지적 끝에 결국은 신입생 모두가 해낸다. 그리고 언뜻 격려처럼 들리기도 했던 선배의 말 한마디. 



"여러분, 다 할 수 있는데 왜 안합니까?"


'그래, 소심하고 겁 많고 살면서 한번도 소리질러본 적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얌전한 친구들도 다 해낸다. 뭐가 걱정되고 두려워서 못 한다고 생각했을까.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할 수 없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를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정신승리가 아니라, 스스로 내재된 자기 억압을 깨우는 말로 받아들였다. 내 능력과 가능성을 믿는 것, 해보지 않았다고 시도조차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 때로는 먼저 해낸 보통의 다른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는 것이다.



강렬하고 씩씩하게 쏘아대던 그 문장들은, 수술실 간호사로 처음 일할 때 마음 속에서 자주 떠올랐다. 불안과 걱정, 두려움, 능력에 대한 불신, 나아지지 않는다는 좌절감... 그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회오리칠 때 '그래도 나에게 조금 더 성장할 시간을 믿고 줘보자. 결국에는 할 수 있을거야. 정말 내가 끝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못한다고, 안 한다고 스스로 단정짓지 말자.' 생각했다. 위기의 순간 나를 깨운 말들은, 스스로가 만든 틀을 깨고 나아가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대들은 모르겠지만, 그 말 한마디가 신규 시절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제 나는 일하면서 연기하는 법이 늘었다. 다른 수술을 지원하면서 처음 접하는 수술 재료, 장비 등은 인계를 받더라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100% 자신있게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존에 인계를 주신 선생님 혹은 카탈로그를 믿고 나의 기억력과 경험을 믿고 ‘할 수 있는 척’ 한다.상황에 따라 특이사항이 생겼을 때 “이 장비는 제가 다뤄보지 못해서…”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진료과나 집도의, 주변 선생님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피가 뿜어지고, 수많은 기구와 실, 거즈가 오가는 초응급 상황에도 ‘무섭지만 무섭지 않은 척’한다. 일단 가장 큰 목표는 지금 이 상황의 극복, 원활히 수술이 지원될 수 있도록 내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더욱 상황에 집중하여 빠른 대처가 가능할 수 있도록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의사소통 시 소리지르기 보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명확하지만 신속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비록 무서운 상황이 생기더라도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집중하고,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하지만 이에 고집부리지 않고, 상황이 더욱 급박하게 변하여 손이 더 필요한 경우 주변에 적극적으로 협조와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초응급 상황이 벌어진 수술을 마치고 나오면 온 몸이 땀에 흠뻑 젖거나, 글러브 속이 땀으로 가득하고, 신발이나 바지가 피로 젖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환자가 나가서야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나의 떨렸던 두 손과 뛰는 심박동수를 느낀다. ‘환자가 수술을 잘 받고 나갔다, 잘 해냈다.’ 이거면 된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못해봤던 경험을 했고, 내가 주변 사람과 상황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렇게 나는 나를 믿고, 먼저 해낸 보통의 다른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를 속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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