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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Nov 08. 2020

나의 독립생활기 1

집을 떠나는 기분

독립이라는 단어가 로망처럼 다가온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머리가 조금 자란 중학생 때 정도이지 않을까. 좁은 집에 할머니와 사촌들까지 함께 사느라 자기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던 탓에 늘 혼자만의 공간이 고팠다. 누군가의 터치 없는 공간에서 자유롭게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 그 자체가 꿈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만의 방이 생기면서 자유에 대한 욕구가 조금이나마 해결되자 오히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시간이 소중해졌다. 집에서 나가면 손님이라더니, 누나들은 자주 온다고 해도 두 달에 한 번이었다. 나는 엄마 아빠의 손님이 되기 싫었다.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일과를 공유할 수 있는 하루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르면 내년, 늦으면 내후년 안에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엄마의 말을 듣자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독립'의 순간은 오겠구나 싶었다. 그건 뭐랄까, 혼자 남겨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남겨지는 게 아니라, 단어의 뜻대로 홀로 일어서는 독립이 하고 싶었다. 그니까 내가 독립을 한 건 ‘로망'이나 ‘자유' 때문이 아니다. 독립만은 타의나 어떤 상황 때문이 아닌 오롯이 나의 선택이길 바랐고, 지금이 그럴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는데(2주 후에 독립을 하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안 그래도 ‘너를 언젠가는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독립에 찬성했다.




집을 떠나기 하루 전날, 당장 필요한 물건들 위주로 짐을 꾸렸다. 로션과 옷, 수건, 노트북, 몇 권의 책과 편지 꾸러미…. 작은방은 점점 빈 공간이 생겨났고, 캐리어는 빈틈없이 채워졌다. 여행 짐을 싸는 게  설렘이라면, 이삿짐을 싸는 건 왠지 모를 서글픔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그리고 집에 남게 될 부모님이 눈에 밟혀서. 결혼하자마자 당신들의 조카를 키운 탓에 두 분은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였다. 셋이었고, 넷이었고 때론 여섯이기도 했던 가족은 이제 처음으로 둘이 된다. 친구들은 ‘네가 나가면 부모님 좋아하신다'라고 웃었지만, 나는 알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엄마는 한동안 허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할 거라는 걸. 혼자 남은 엄마가 발견하길 바라며 서랍에 편지를 넣어뒀다. 당신의 아주 길었던 한 챕터가 끝나는 걸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이사하는 날, 미처 다 못 꾸린 짐을 챙기는데 엄마가 계속 무언가를 들고 내 방으로 왔다. 더울 때 필요하다며 부채를, 이건 꼭 있어야 한다고 전기 파리채를, 꼭 챙겨 먹으라며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영양제를. “엄마, 이제 캐리어에 빈 공간이 없어”라고 말해도 끝이 없다. 부채와 영양제, 전기 파리채에 이불 두 개까지 금색 보자기에 가득 담겼다. 이걸 다 가져갈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어떻게든 챙겨야 엄마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아서 군말 없이 넣었다. 잠시 후, 엄마 아빠와 함께 짐을 들고 내려와 택시를 불렀다. 트렁크와 뒷자리에 짐을 싣고 인사를 하려는데 뒤에 있던 차가 경적을 울려 급하게 차에 올라탔다. 창문으로 “아들, 잘 살아.”라고 말하는 엄마 아빠를 향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아, 한번 꽉 안았어야 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고 잘 살아보겠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은 경적 소리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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