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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Nov 18. 2020

한 달간의 이별 #3

한 달간의 이별 그  마지막



비행기 표는 수술로 취소됐고, 환불이 되지 않는 싼 티켓이라서 돈은 돌려받지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치료나 열심히 하자 싶어 잘 먹고 잘 자면서 회복에만 전념했다. 수술 전에는 제때 출국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수술 후 에는 치료를 모두 마치고 떠날 수 있단 생각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한 번 취소된 것쯤이야. 그렇게 맘을 다독이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식판을 치우는데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잠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침 회진 시간 담당 의사 선생님이 내가 있는 병실로 들어와 안부를 물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퇴원이 늦어지면 또 출국을 제 때 못할 수도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단지 다른 날 보다 좀 더 피곤한 날이겠거니 싶었다. 누구나 유달리 피곤한 날은 있지 않은가?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내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오며 버럭 핀잔을 주셨다. 몽롱한 상태로 내가 뭘 잘 못 말했는지를 되짚어 봤다.
[피검사 결과가 아주 좋지 않아요. 간 수치가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어요. 치료에 쓰이던 약물이 부작용을 일으킨 것 같아요. 간 수치는 한 번에 정상으로 떨어뜨릴 수 없어요. 치료하면서 계속 지켜봐야 해요.]
[언제까지요?!]

악몽이 맞을 거야…….. 그날 밤 남편과 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 후 언제 회복이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고 불가피하게 비행기표는 또 취소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정해진 스케줄이 있던 탓에 더 이상 출국 날짜를 미룰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남고 남편은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첫 번째야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디 용하다는 점집에 가서 점이라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떠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 인 걸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이제는 가는 것이 더욱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날 남편은 병원에 들러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나는 애써 씩씩한 척했지만 병실 문이 닫히고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치료를 하느라 남편보다 한 달여 늦게 출국을 했고 병원에 입원 중에 공황발작을 자주 일으켰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는 의사 선생님의 강력한 권유로 상담을 받았고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아 함께 치료를 진행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벌어진 상황에 필요 이상으로 절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조금 건강이 좋지 않았을 뿐이고 치료는 잘 받고 있었고, 중간에 약물 부작용이라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출국이야 치료 마치고 돈 지불하고 비행기 표 다시 끊으면 될 일이었다.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온 가족들 앞에서 틈만 나면 눈물 콧물 바람에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가만 , 혹시 그 저주가 영향을 미쳤을까?  

 내가 일을 시작하던 초창기 회사에서 만난 동료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 나이 29 살 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지 이미 끝났다고 봐야지. 바뀌기 힘들어.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벌이도 대충 그 비슷비슷하게 평생을 간다고, 나를 봐. 내가 이제 뭐 실력 엄청 늘려서 큰 게임 회사에 취직을 하겠니 아니면 게임 바닥에서 억대 연봉을 받겠니. ]
점심 먹고 믹스커피 한 잔 타 마시며 하는 넋두리 한 소절일 뿐인데, 고된 서울 살이 초창기, 나에게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마치 저주같이 직장생활을 하며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귓가를 웅웅거렸다.  게임 회사를 다니는 초창기 자주 회사가 문을 닫아 월급은 밀렸고 처음 독립을 해 혼자 살림을 꾸려나가는 삶도 만만치 않게 느껴졌던 차에 마치 내 미래를 보고 있는 듯 섬뜩하게 느껴졌다. 당시 나는 29살 보다는  어렸기 때문에 아직 기회가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고, 설령 그렇게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무서웠다. 회사 동료의 말대로 게임 그래픽 아티스트로서의 삶은 불안정했다. 실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철새처럼 회사를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좀 더 잘할 수 있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내내 나를 몰아붙였다. 저주의 29 살을 지나 30대에 다다르면서 나는 저주가 점점 실현되고 있다고 느꼈다. 20 대 초 중반의 패기는 이미 사라져 버린 채 지칠 대로 지친 나만 남았을 때, 남편은 캐나다로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남들에게는 별 거 아닌 해외생활일 수 있지만, 어학연수 한번 받아 본 적이 없는 나와 남편에게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때문에 캐나다행은 인생 제2의 기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내내 나를 괴롭혔던 29 살의 저주를 깨버리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시작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는 내 모습이 절망스러웠다.

병원에서 퇴원을 한 후 1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받으며 경과를 지켜봤다. 몸이 많이 쇠약 해 진 탓에 매일매일 산책과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키워나갔다. 간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검사 결과를 받은 날 나는 바로 남편에게 음성 통화를 걸었다. 이제야 비로소 갈 준비가 완벽히 된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기쁨에 들떠 전화를 걸어 비행기 표 예매 날짜에 대해 얘기했다. 한 껏 신이 나있는 내 목소리와는 반대로 남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내게 남편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여기 와서 너무 실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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