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이집트 뉴웨이바에서 요르단의 아카바로 국경넘기
# 2010.7.30. 금요일, 카이로
중동 여행 11일 차의 기록.
드디어 아라비아 반도로 들어가는 날.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들어가는 루트는 흔히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하늘길로 들어가기(비용에만 문제가 없다면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바닷길로 페리를 이용해서 항구도시, 아카바로 들어가기,
세 번째는 육로로 돌아 이스라엘 국경을 거쳐 가는 방법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가능한 동선과 비용을 줄이는 두번째 - 페리를 타고 홍해를 건너는 방법이었다. 이스라엘 국경까지 넘기엔, 좀 버거웠고, 어릴 적에 무심히 읽던 성경에서 나오는 그 '홍해'를 가로질러 대륙을 넘는 느낌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달까? 마치 모세가 바닷길을 열었다는 그 속에 묻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두근거림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황당한 상상도 끼워넣었다. 이런 허세에 가까운 체감을 위해 몸이 고달파지곤 한다. (그냥, ENTP라서 이런 식을 선택하는 건가, 의문스럽긴 하지만, 이런 체험 자체를 즐기고 감내하는 게 내 성정이려니 한다. )
그렇게 몇 천 년 전의 역사와 신화의 현장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기분을 만끽해보기로 했다.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어쩌면 더 위험한?) 세 번째 선택지인 육로 이동은 이스라엘을 거쳐 들어오는 길이다. 이 경로는 이스라엘과 중동지역 나라 간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입국과 출국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경험담이 있었다. 게다가 한국인의 경우 북한과 남한의 국적에 따라 오해와 시비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어 과한 모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무 문제없이 통과 가능하겠지만, 위험의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다니는 상식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 이러한 이유인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요르단으로 들어오는 직행 버스 편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적어도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
카이로의 하루를 즐기며 마음의 정비를 했다. 오늘 밤 23시. 이 복작복작 붐비는 대도시를 떠나 또다시 황무지로 향한다. 카이로의 투르고만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밤 버스는 이집트 항구도시인 뉴웨이바로 향했다.
2010.7.31. 토요일 07시. 뉴웨이바에 도착하다. – Aqaba, Jordan
중동 여행 12일 차의 기록. 요르단의 도시 아카바 (Aqaba, Jordan)로 입성하다.
23시에 출발해 07시에 도착. 밤버스의 불편함은 꿈결처럼 스치고, 비릿한 바다 냄새와 햇살을 받으며 뉴웨이바 정류소에 내렸다. 항구도시라더니, 도시라 부르기엔 무색한 황량한 벌판과 바위산. 그리고 눈앞에 홍해red sea만 있었다. 페리 사무실이 문을 열기까지 2시간,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다리는 현지인들이 제법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토요일은 빠른 페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때서야 확인하게 되었다. 론리플래닛을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내 탓이다.
정상적인 운행편에 탑승하긴 어려웠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고) 하루 1편 운항하는 "슬로우" 페리가 있단다. 선택할 여지가 없잖아. 이 항구에서 하루를 보낼 순 없으니, 80불을 지불하고 티켓을 끊었다. 또 기다림의 시간. 근처의 식당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밤 버스의 피곤함을 달래 보았다. 두어 시간이 흘러 선착장으로 들어갈 시간.
선착장이 어마무시 넓은 까닭에 내 표에 써진 배 이름은 항구에선 찾을 길이 없었다. 울타리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는 표식만 눈에 띄었다. 돌아 돌아 짐, 여권 확인, 출국장 스탬프 그리고 또 확인 또 확인... 절차가 끝나니 엄청나게 넓은 시외버스 대합실과 같은 곳에 승객들을 모아놓는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도 배가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항구, 딱딱한 대합실 벤치에서 혹시나 동양인이 없을까 계속 두리번거렸다. 내 자리 주변엔, 선착장 안에 들어올 때부터 만나게 된 현지인 가족이 있었다. 선착장 입구에서 부터 안내를 도맡아 해준, 보석알이 무거울 정도로 큰 반지를 두 개씩이나 낀 아주머니와 아들은 시종일관 나를 챙겼는데, 타지에서 이렇게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있나, 생각해볼 정도였다. 나에게 아랍어란 그저 곡선의 유희이자 낙서같은 형상일 뿐이고, 아주머니도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현지인이었다. 그저 히잡 속에 동그랗게 나온 얼굴에서 미소를 발사하며 눈짓과 손짓으로 나를 이끌고 다녔다. 표 검사까지 마치고 대기실에 오니, 이제 안심하라고 몸짓 가득히 보여준다. 달달하고 뜨끈한 차이도 한 잔 사주기까지. 타지에서의 이유 없는 호의는 대체로 사양하는 것이 맞지만, 내 상태가 제정신일 리도 없었다.(생각해보면, 밤새 쉬지 못한 내 행색이 이름모를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살핌을 받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슈크란(=thank you)’이라는 쌩기초? 아랍어도 알았지만, 제정신이 아니므로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땡큐’만을 내뱉으며 보석알 아주머니 꽁무니를 쫓아 다닌 셈이다.
‘절차’에 혼을 뺏겨 돌아다니다 보니 따뜻한 차이 한잔에 마음도 몸도 노곤히 풀어졌다. 이집트의 화려하고 유명한 관광도시, 후르가다나 카이로에서 느낀 개방성이나 장사 잘하는 이집션들의 유들유들함과는 또다른 분위기였다. 항구에서 만난 뱃사람들의 거칠고 단단한 모습들에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대합실에서 한동안 이런 노곤함에 절어 있으니 아주머니가 적당한 장소까지 물색해주셔서 우리 셋은 드러누어 세상모르고 늘어지게 쉬기까지 했다.
두어 시간이 흐르고 관리요원 같은 사람들이 남대문 장사치들처럼 암호 같은 아랍어로 소리치니 어디선가 보따리를 든 백여 명의 승객들이 대합실로 모여들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다들 대체 어디에서 갑자기 그 신호를 알아듣고 모여든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아랍어 일색이었지만 생존의 레이더를 한껏 세우고 집중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걸어야 할 지가 순식간에 결정된다. 헐레벌떡 반사적으로 트렁크를 들고 쫓아가니 이제껏 내가 봤던 차량 중 가장 험난한 버스에 승객들을 짐짝과 함께 (굳이 묘사하자면, 짐짝과 큰 차이 없이!) 구겨 넣어 태운다. 이것도 혹시 못 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이제까지 타본 만원 버스의 절망감과 혼돈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버스는 항구를 한참 돌아 선착장 깊숙이 들어갔다.
감격스럽게도, 새벽부터 기다려 드디어 내가 탈 배(라고 티켓에서 말하는) “세헤라자데” 호 앞에 선다. 그제야 마치 커다란 미션 하나를 통과한 듯 맘이 놓이게 되었다. 아직 출국은커녕 겨우 티켓 사고 탈 배를 찾아 그 앞에 서 있게 된 것뿐인데도.
여기서부터 현지인과 외국인 줄이 나뉘며 아주머니 일행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에 들어갈 때도 표와 여권을 확인하고, 아랫층엔 트렁크를 던져두어야했고, 리셉션 같은 중앙층에 도달하니, 여권을 걷어가고, 돌려받는 확인표를 받는 출국의 절차가 남아있었다. 의외로 주변 환경에 대한 눈치가 빠른 편인 나는, 눈에 띄는 (착해 보이는) 체코인 커플이 있길래 인사를 나누다 이들과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슬로우 페리- 였으니 뭐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2시에 출발한 우리의 세헤라자데 호는 5시경이 되니, 갑판에서 목적지인 요르단의 아카바 Aqaba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호와 기쁨으로 하선을 준비했지만, 그 준비가 5시간이 걸릴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줄을 서면서 언제쯤 내려갈 수 있냐는 질문에 '5분만 기다려.'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그 5분이 이후에 5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밤 10시 30분쯤 되니 포기하고, 그저 넋을 놓은 채, 언젠간 이 배에서 내릴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티게 되었다. 결국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딘 후, 캐리어를 찾아 끌고 육지로 나오니 밤 11시. 카이로를 떠난 지 정확히 24시간 만에 요르단 땅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5분 정도 걸어나와서 가건물 같은 허름한 사무소에서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입국도장이 찍힌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중동인들 특유의 큰 눈동자와 낯선 이를 강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이곳의 거친 분위기와 맞물려 더욱 쫄깃하게 긴장시켰다.
그래도, 계획한 대로 홍해를 건너 다행히 요르단의 해양도시 아카바에 도착했다- <국경을 계획대로 넘었다>는 사실이 기쁨으로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한밤중에 도착했기에 함께 내린 외국 여행자들과 택시를 나눠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피곤에 절어, 눈에 띄는 가장 첫 번째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경로는 요르단의 가장 중요한 유적인 페트라 petra였고, 아카바에서는 2시간여 거리에 있는 와디 무사라는 마을까지 다시 이동해야 했다. 그저 빨리 잠을 청했다. 단지 저 대륙간의 작은 물길, 홍해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고난의 바닷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