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벌어오는 생활비로는 빠듯하다. 하지만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불만스러운 건 절대 아니다. 우리 남편은 학창 시절부터 직장인인 지금까지 존경스러울 정도로 성실했다. 그에 반해 나는 웹소설 작가 꿈나무인데 사실은 재능이 요만큼도 없어서 어디 가서 알바라도 뛰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 가정에서 도움이 안 되는 건 사실 내 쪽이다.
61년생인 우리 엄마는 정말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제는 일곱이나 되었는데, 외할아버지는 일하는 족족 번 돈을 거의 도박으로 날렸다. 엄마와 이모들은 어린 시절 굶던 기억을 지금도 울면서 이야기한다. '나 어렸을 때는' '나 때는'. 정말 귀에 박히게 듣는 소리라 지긋지긋하지만 안 들어줄 수가 없게 눈물겹다. 엄마는 가끔 외할머니와 같이 포도농장에 가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포도를 주워 먹었다고 한다. 외할머니 입장에서는 먹을 것이 없고, 포도농장주인 입장에서도 어차피 못 먹는 포도니까 어린아이가 들어와서 먹게 해 준 것이다. 엄마는 항상 바닥에 있는 포도만 주워 먹었다. 머리 위에는 신선한 포도가 널려있는데, 그 포도는 아예 못 먹는 건 줄 알았다고 한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나 역시 유복하게 자라난 것은 아니어서, 엄마와 학창 시절에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면 항상 행사장에 가서 옷을 고르거나, 중저가 브랜드 세일상품에서 옷을 골랐다. 그게 아니라도 엄마가 '여긴 안 돼.', '여긴 너무 비싸.' 하며 폴리스라인이 쳐지기라도 한 듯 막아서는 브랜드 매장들이 있었다. 그때 훈련이 되어서 성인이 될 때까지도 그런 브랜드들은 들어가 볼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후에 사귀게 된 남자친구가 백화점 수입브랜드에서 신상을 사는 것을 보면서 말린 적이 있었다. '그 건 안 돼. 너무 비싸. 이런 옷은 사는 거 아니야.' 그래서 "왜 안 돼?"라고 순수하게 물어온 그에게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차분히 결제를 하는 그를 보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그런 비싼 브랜드의 옷이 엄마의 머리 위 포도와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둔 지금도 내가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있을까 봐 두렵다. 해주고 싶은데 마냥 다 해줄 수가 없을 때는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든다. 보통 아이들을 데리고 아웃렛이나 스파 브랜드에서 옷을 산다. 쑥쑥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 것이 합리적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백화점에서 옷을 사준 적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퍼스트클래스에서 먼저 내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아이들이 다음에는 우리도 여기 타자고 할 때 조금 미안하다. 그러면서 걱정도 된다. 내가 또 아이들 머리 위에 포도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옷에 관해서 서러운 기억이 하나 또 있다. 엄마는 언니 중학교 입학 때 그 당시 유명한 '엘리트'라는 브랜드에서 교복을 맞춰주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시기 하루는 엄마가 나를 불러 앉히더니 학교에서 졸업생들이 주는 교복을 물려받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3년 내내 입는 교복인데, 다른 아이들이 알면 놀림을 받을 것 같았다. 나는 엄마한테 화를 내면서 안 된다고 하고 울기까지 했는데, 하루 정도 고민하고 나서 순순히 물려 입겠다고 했다. 어리기도 했고, 엄마의 경제 사정을 잘 모르기도 했으니까. 지금 같으면 절대로 안 그러겠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 교복을 입는 내내 누가 물려 입은 교복이란 사실을 알아차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고, 당시 우리 집의 경제 상황이 그 정도로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지독한 궁상이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싫지만 알 것도 같다. 물려 입는 교복에 대한 서운함을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엄마의 가난함 게이지는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자기는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먹으면서 교복 물려 입는다고 우는 아이는 엄마에게 공감이나 동정을 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얼마나 서운했고 얼마나 곤란했는 지를 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갖게 하고 싶지 않다. 교복 그거 얼마나 한다고 어린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싫다. 성장해서까지 남아있을 생채기를 돈으로 막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 백화점에서 제한 없이 하는 쇼핑, 호텔에서 하는 식사. 주기적으로 떠나는 호캉스 여행, 조카들에게 펑펑 베풀어주고 싶은 마음. 하고 싶은, 해주고 싶은 것은 잔뜩 있다. 또한 궁금하다. 이 것 저것 세어보고 아끼고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의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 내가 지금 아르바이트, 혹은 정식으로 취업해서 맞벌이를 한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집 하나 사기도 힘든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니. 집값이 이 수준이면 그건 정말 다음 생도 아닌, 다다다다음 생에서나 가능할까 싶다.
부자가 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남은 것은 하나다. 머리 위 포도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직장 다닐 때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도 모자라진 않는데 조금만 더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항상 있다고. 조금만. 조금만 더. 그 조금 더 갖고 싶은 마음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얼마를 벌겠다는 마음보다 더 무섭다.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욕망을 계속 낳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곳의 뭔가를 원하는 것. 그 마음은 허영심에서 비롯된다. 지금보다 남편 월급이 더 많아지고 다른 수입원이 늘어나도, 모자라고 하고 싶은 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뿐만인가. sns에 유튜브에, 많이 가진 사람들이 대결이라도 하듯 일상을 공유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나 자신은 얼마든지 초라해진다.
그러니까 문제는 포도가 아니라 나였다. 어떻게 된 게 나는 항상 결핍만을 본다. 학창 시절의 우리 가족 경제상황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값비싼 브랜드의 옷은 많이 못 입어봤어도 합리적인 가격에서 예쁜 물건을 잘 고르는 멋쟁이 엄마 둔 덕에 유행하는 옷, 예쁜 옷은 여한 없이 입어봤다. 결국 사춘기 시절 예민하고 기질적으로 전전긍긍하는 성격 때문에 한이 된 것이지, 나는 그 정도로 비운의 주인공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결핍된 것만을 보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굳이 머리 위를 보거나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보다 자신의 곁에 있는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도록 내가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아마 부자가 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