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에서 만리장성을 만나다

자위관(가욕관) 여행기 2 [가욕관의 예술가]

by 와초 Wacho


여행자의 낯선 취미

가끔 어리석은 취미를 즐긴다. 그중 하나가 여행지에서만큼은 기꺼이 호객님이 되는 것이다. 진심을 다해 관광객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다면, 그 끝에선 낯선 희열이 나를 반긴다. 10원에 구한 물건을 100원에 판매한 관광지의 상인은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그러면 물건을 구매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말에 그들이 서운할 수도 있겠다. 물건 원가가 10원일 뿐이지, 유명 관광지에서 관광객을 상대한다는 것은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인의 노고는 쉽게 간과된다. 우리는 실은 그들의 열정과 치밀한 노력, 성취감과 기쁨으로 연마된 옥돌 같은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상술로만 100원을 꽉 채운 물건도 있을 순 있다. 그러니 여행자는 관광지에서 어떤 100원을 소비할지, 어떤 종류의 호객이 되고 싶은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오랜 시간 갈고닦은 옥돌을 파는 상인에게선 봄볕처럼 귀한 빛이 난다. 그 빛을 가려내는 것 또한 관광객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관자오(통행권)를 판매하는 노점] 고수의 향기


고대의 성문을 빠져나가는 법

웅장한 가욕관을 구석구석 탐험하다 보니 마지막 관문 앞에 다다랐다. 고비사막으로 통하는 서쪽 문이다. 관문을 나가기 전, 성벽 한쪽 노점에서 관자오(关照, 통행권)와 링파이(令牌, 통행영패)를 팔고 있었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당나라 시대에 국외로 이동할 수 있는 일종의 여권이라고 했다. 명나라가 축조한 가욕관에서 당나라 여권이라니. 시대가 맞지는 않지만 재밌는 발상이었다.


순간 중국 고장극의 한 장면이 그려졌다. 백성들이 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 통행권을 확인하는 병사 앞에 줄지어 있는 그런 장면. 드라마에선 적에게 쫓기는 주인공이 수레에 실린 커다란 야채 바구니에 숨어 몰래 성문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렇게 고대의 향수에 취해 이 노점에 이끌려갔다.


라오반(老板, 사장님)의 얼굴은 송나라의 유명한 판관 ‘포청천’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의 기세는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케 했다. 한쪽에는 칼날 부분이 반월 모양인 긴 칼이 세워져 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관우의 칼로 유명한 ‘청룡언월도’였다. 기세 좋은 라오반은 그 옛날 오직 임금에게만 허락되던 황룡포 대신 황룡 쫄티를 입고 있었다.


노점의 모습을 보며 어떤 이들은 매우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었고, 어떤 이들은 우스꽝스럽다며 비웃으며 지나갔다. 또 누구는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지나친 상술이라고 눈살을 찌푸릴 이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이런 변방의 유적지에서마저 돈 냄새를 풍겨야 하냐는 비난을 면하긴 어려워 보였다. 안타까웠다.


[판관 포청천] 개작두를 대령하라! [명장 관우] 출처: Baidu


가욕관에서 만난 크리에이터

여행의 묘미는 의외성에 있다. 그런데 문화유적지가 주는 감흥은 매번 비슷하다. 유적지에 얽힌 역사 이야기도 듣다 보면 그 이전에 다녀온 곳과 별다를 바가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는 고만고만한 역사적 의미만 남은 고요한 옛 관성인 가욕관, 그러나 라오반의 과감한 상상력은 무채색의 성 곳곳을 쾌활한 형광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그야말로 내가 본 최고의 크리에이터였다.


포청천이자 장비인 라오반은 송나라나 삼국시대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을 것 같은 희한한 옷을 입고, 명나라 관성에 앉아 당나라의 통행권을 팔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첨성대 옆에서 이순신 장군의 갑옷을 입고 암행어사의 마패를 팔고 있는 것이다. 그의 획기적인 퍼포먼스에 허를 찔렸다. 나는 어느샌가 노점을 채우고 있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울리지 않는 조화가 중국에 대한 나의 역사인식을 되살린 셈이다.


옛날 통행권은 중국의 여느 기념품 상점 쇼케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오반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통행권을 눈여겨보기나 했을까?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 기운에 압도되어 과거의 한 장면에 빠져보고 싶어졌다. 대나무로 만든 통행권 하나가 눈에 띄었다.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것이 꽤 고급스러워 보인다. 이 정도면 당나라에서도 학식 있는 중급 관료 집안의 것으로는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하며 부족한 상상력을 동원했다. 라오반은 생김새뿐 아니라 목소리도 포청천처럼 근엄했다.


“쩌스뚜얼치앤 这是多儿钱?” [이거 얼마예요?]

“량바이 两百。” [200위안]

“나이거바 拿一个吧。” [하나 주세요]

“쟈오션머밍즈 叫什么名字?” [이름이 뭐예요?]

...

“쩐스하오밍즈. 한궈런? 真是好名字。韩国人?” [좋은 이름이네요. 한국인이예요?]


이름을 알려주자 좋은 이름이라며 터프한 그의 얼굴에 상냥한 미소가 피었다. 세상에, 너무 따스했다. 한한령이 떨어진 이국 땅에서 나도 모르게 무장하게 되는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각인기로 내 이름을 새겨주는 그의 모습에 감탄했다. 세심하고 차분하게 획을 그으면서도 거침없는 손놀림에 세 글자가 멋지게 쓰여가고 있었다. 와, 이 사람은 캘리그라퍼였구나. 잠시 넋을 놓고 감상했다.


고운 홍색 상자에 담아 그가 건네 준 통행권에는 내 이름 아래에 네 글자가 더 적혀있었다.


"韩国友人" [한국친구]


여행자는 이런 사소한 호의에 감격하게 된다.


“씨에씨에! 谢谢!” [감사합니다!]


고마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그의 호의에 답했다. 그러자 그가 또 따스하게 미소 짓는다. 무장한 마음이 풀어지다 못해 흥겨움이 밀려왔다.


여행길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중국에선 기이한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이 날 만난 가욕관의 상인은 참 독특하고 멋진 예술가였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로 기억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랜 시간 수련한 무공의 고수에게 얕지만 귀한 비책 하나를 선사받은 양, 그를 만난 후의 발걸음이 무척 유쾌하게 움직였다.



[관자오] 나의 호객 욕구와 가욕관 황금 크리에이터의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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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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