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척, 괜찮은 척했던 시간들에 대하여
작년 나는 갑상선암으로 갑상선 전절제 수술을 받고, 동위원소 방사성 치료까지 받았다.
그 시간은 나를 깊이 흔들었고,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물론 재작년 아이를 낳은 일도 내 삶을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건 내가 충분히 상상하고 준비했던 일이었기에 그렇게까지 나를 흔들진 않았다.
암을 진단받았을 때,
갑상선과 작별하러 수술실에 들어갈 때,
목에 칼날이 뚫고 들어온 듯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
동위원소 방사성 치료를 위해 한 달간 호르몬약을 끊고 저요오드 식단을 할 때,
사방이 막힌 ‘방사선 금지구역’ 병실에서 홀로 방사성 알약을 먹고 3일간 입원했을 때,
내 몸에서 나오는 방사선에 피폭될까 봐 요양병원에서 3주간 가족과 떨어져 있었을 때,
나는 늘 씩씩하게 웃었다.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암’이라는 글자가 붙었지만 제 때 치료받으면 생존율 99%라는 갑상선암에 걸린 것에 감사했다.
”착한 암 아니에요. 누가 거북이암이래요! 얼마나 힘든데. “라고 하소연하는 후기들은 보기 싫었다. 실제로 다른 암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 받은 것인지. 아픈 증상 때문에 발견한 것도 아니고, 암세포 크기도 작다고 했다. 수술하고 치료받으면 간단하게(라고 생각했다) 나을 병인데, 치료를 받기도 전에 죽는소리는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실비보험(자그마치 1세대)과 암보험을 두 개나 가입해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덕분에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비록 암환자가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나를 전폭적으로 응원하고 사랑해 주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음을 깊이 느끼며 매우 든든했고, 그들의 응원에 비해 가벼운 질병임에 감사했다.
수술 당일, 별 거 아닌 수술이니 가족들도 오지 못하게 하고서, 혼자 수술실로 의연하게 입성했다. 전공의 파업난 속에서 훌륭한 교수님께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다.
저요오드 식단을 할 때는 예상외로 즐거웠다. 덕분에 건강식을 챙겨 먹을 수 있다고 가족에게 공유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요양병원에서는 지친 육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몸과 마음만 돌보면 되는 날들을 선물 받은 것 같아 감사한 일이라 믿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이 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누구보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다져가며 점점 단단해져 갔다. 투병을 위해선, 치열하고 바빴던 일상은 억지로라도 내려놓아야 했다. 완벽주의 성향으로 늘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왔던 나는 강제로 갖게 된 느린 시간에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많이, 아주 많이 웃었다.
그런데 ‘착한 암’이라고 불리는 갑상선암은 자기 닉네임값을 하지 못했다. 전혀 착하지 않았다. 읽고 싶지 않았던 그 후기들처럼, 내 몸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남들처럼 살겠다고 따라 하다가는 몸이 화들짝 놀라 성을 낸다. 일상생활이 어렵도록 몸이 힘들어진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피곤함이었다.
모든 치료를 마친 지 10개월.
나는 이제야 감사함과 웃음 뒤에 숨어있었던, 아팠었던 나를 조금씩 만나고 있다. 그때의 좌절감과 무서움, 슬픔과 절망을 조금씩 뱉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 너무 울고 싶었다고.
수술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아, 나 예전과는 다르겠구나.’
수술 후 첫 외래에서 전이가 있고 동위원소 방사성 치료까지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는 그동안 쌓아온 단단한 마음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사성치료 때문에 호르몬약을 끊고 저요오드 식단을 할 때는 사실은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갑상선 호르몬이 없는 몸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아 힘들었다.
방사성치료와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한 달간 시어머니가 나 대신 아이를 돌봐주시겠다며 우리 집에 와계셨다. 치료받으러 가는 날, 날 보고 꾸역꾸역 눈물을 참으시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삐져나오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런데 사실은 엉엉 울고 싶었다. 눈물구멍을 막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울면서 병원에 도착했을 것이다.
‘방사선 금지구역’이라는 빨간 글씨로 표기된 철문 뒤에, 내가 3일간 지내야 할 병실이 있었다. 방사성으로 코팅된 빨간 알약을 먹은 뒤, 혼자 입원해 있는 시간은 많이 무서웠다. 유리창 너머로 바깥은 보이는데, 열 수 있는 문은 없었다. 병실에 꼭꼭 갇혀있는데, 그 사실을 상기하면 질식할 것만 같아서 창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방사성 알약이 목구멍을 넘어간 후로, 구역질 나는 속을 달래가면서 괜찮아보려고 무지 애썼다.
그 시간을 견디고 난 뒤, 감옥에서 풀려난 죄수처럼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생활은 꽤 평온했다. 따뜻한 간호사 선생님들과 원장님, 같은 경험을 한 환우들과의 교류로 아픈 몸을 회복하면서 위안을 얻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문득문득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15개월 된 딸을 한 달 가까이 보지 못하는 현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아침을 맞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였던 평범한 일상이 지워지고 있었다.
모든 치료가 다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갑상선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솔직히 종종 울컥했다. 갑상선이 없는 사실을 잊고 살고 싶은데, 약해진 나의 몸은 계속 나를 각성하게 만든다. 괜찮다가도 갑자기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단 듯 무거워지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리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날씨가 조금만 더워도 몸은 금세 열기를 뿜어낸다.
나는 그때 왜 울지 못했을까. 왜 슬프고 무서운 감정을 꺼내지 못했을까. 가족들이 슬퍼할까 봐. 엄마가 울까 봐. 남편이 나보다 더 절망할까 봐. 그게 무서웠던 것 같다.
그리고 더 무서웠던 건, 내가 무너질까 봐.
한 번이라도 ‘나 겁나’라는 생각을 스스로 의식하게 되면, 와장창 깨져버릴 것 같았다. 그랬다면 그렇게 힘차고 단단하게 치료과정을 지내지 못했을 거다.
불행함을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 또한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울지 못했던 나는, 지금에서야 조금씩 울고 있다.
쓰면서 울었고, 다시 읽으며 울었다.
감사와 긍정 뒤에 숨어 있던 나를, 이제는 놓아주고 싶다.
울지 못했던 나를, 그저 안아주고 싶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꾹꾹 참아냈던 나에게, “사실 정말 무서웠지?”라고 말해주는 중이다.
그리고 그 말이, 내가 다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첫마디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 매주 화요일, 하루를 사유하는 글로 인사드릴게요.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