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자격

나는 왜 내가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by 와초 Wacho

이제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다. 그래 맞다. 나는 동네 영상의학과에서 갑상선암이 의심된다며 세침검사를 권유받던, 바로 그때부터 불행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이 밖으로 비집고 나오지 못하게 꽁꽁 감쌌다. 쉬운 방법이 있다.


감사하기.


이보다 더 아프고 완치가 어려운 희귀 질병,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종류의 암에 걸리지 않은 게 어디냐. ‘비교적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라고 되뇌다 보면 평온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한마디로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상기하며 위로받은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마음이 너무 죄스러워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병마와 싸우며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누군가와 그의 가족들에게 너무 실례가 되는 것 같았다. 나의 위선을 ‘감사’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느낌이 들어 내가 싫어졌다. 위선자. 나는 위선자다.


되돌아보면 이런 류의 죄책감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 그때는 더더욱 언어로 꺼내 보일 자신조차 없었다. 불행의 원인이 굉장히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고통,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다가도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절망.


그런 내 감정은 “그럴 자격 없어”라는 세상의 말에 부딪혔다. 무슨 쇼펜하우어라도 되냐며 자신을 비웃기도 했다. ‘너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거야’라는 말들 속에 감정을 억누르며, 우울함조차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더 힘든 상황, 더 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내 슬픔은 말해서는 안 될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내 감정에 자격을 물으며 살아왔다.


내가 불행할 자격이 있을까? 이 정도로 힘들다고 징징대도 되는 걸까?


사실 나는 너무 미치게 불행한데, 사회는 나를 불행을 말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적당한 집, 적당한 직업, 제 나이에 결혼도 했고, 이제 애만 낳으면 되는….’

그 표면들이 나의 고통을 무효화했다. 사회가 만들어낸 행복을 위한 조건 속에서 나는 내 고통의 크기를 스스로 깎아내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픔을 쉽게 말하지 못했다. 오래 묵은 우울함도, ‘착한 암’인 갑상선암으로 힘들었던 감정들도 모두 불행의 자격을 운운하며 마음속 깊은 골짜기에 꼭꼭 숨겼다.


비열한 진심을 고백하자면, 갑상선암인데 반절제한 사람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겨우 ‘반’ 절제해 놓고 꼴에 암이라며 절망하고 힘들다 캑캑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내가 느낀 좌절과 고통의 반의반도 느끼지 못했으면서, 무슨 자랑인 것처럼 동네방네 “나 암이었어요.” 떠들고 다니는 이들을 보면 속이 뒤틀렸다.

안다. 그 일이 그들 인생에선 분명 전환점이 될 큰 경험이었고 나와 같은 두려움 속에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뭔가 억울했다. 그러니 내가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 앞에선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문득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불행을 이렇게 종류나 크기로 나누고, 심지어 ‘이 사람은 불행을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식의 기준까지 만들어두다니.

이런 기준법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스스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믿으며 ‘이번 일은 딱 이만큼 불행을 느낄 수 있어’라며 속삭이고 있던 건 아닐까? 불행이란 과연 그 크기를 재어서 위계를 세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매우 흔하고 쉽게 치료 가능한 암이라고는 하지만, 갑상선이 없는 몸은 이미 호르몬 조절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새벽에 꼭 한 번씩 일어나 약을 먹는다. 신지로이드라는 작은 생명약은 내 몸에 호르몬을 공급하고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해 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잘 지내다가도 조금만 무리하면 몸이 갑자기 모든 활력을 바깥으로 내다 버리는 것 같다. 몸속 이곳저곳에선 이미 각종 대사 이상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젊은 나이이고 갑상선을 갓 잃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일지도 모른다. 대사 이상 징후가 점점 쌓이면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질환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겁이 난다.


명백하게 이런 아픔은 내가 느낀 것이고, 그에 따른 불행은 내가 감지한 것이다. 내 몸과 내 감정은 나만이 느낄 수 있으니까. 그걸 판단할 기준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세상이 기준이 되어 있었다.


“그 정도는 힘든 게 아니야.”

“그 병은 착한 암이잖아.”

“그만하면 감사하지.”


세상이 나에게 말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내 감정은 ‘아플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아픈 몸은 이야기해야 한다. 솔직해져야 비로소 그 고통은 그의 것이 된다. 의료기록이나 사회에서의 이름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느끼는 아픈 몸의 감각과 감정이다. 결과지나 이름이 그의 전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 전부는 자신만이 알고 있고 이야기함으로써 살아있게 만든다.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일은 환대받는데, 소소한 불행을 말하는 일은 왜 쉬쉬하는가? 불행의 이야기에도 자격은 없고, 누구에게나 말할 권리가 있다. 크고 작은 고통을 구분하며 ‘작은 고통은 침묵하라’라는 세상의 기준은, 어쩌면 겸손이 미덕인 이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만든 검열의 허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는 말하고 싶다.

그래, 나 힘들었어, 불행했어,라고.




※ 매주 화요일, 하루를 사유하는 글로 인사드릴게요.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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