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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이니 Oct 29. 2019

교수님, 저 땡땡이 쳐도 되나요?

그 뒤로 삶이 바뀌었다면

공식적으로 20살이 되는 해 -나는 빠른년생이다-에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하게 됐다. 어떤 동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뭔가 하나 정도는 내 친구들보다 먼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하고 유추해본다. 목적지는 싱가포르였고 비싼 물가만큼 치안도 좋다고 해서 결정한 곳이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나홀로여행에 춤추는 기분으로 걸어다녔다. 하루는 작은 크루즈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설상가상 매표소의 아저씨는 쭈구리고 앉아있던 나를 발견하지 못했고 나는 한참을 그 상태로 기약없이 탑승을 기다려야 했다. 한참 뒤에야 나를 발견한 크루즈 선장 아저씨는 승객 단 한 명 만을 위한 운행을 결정했고, 그 승객은 바로 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라 안개가 잔뜩 꼈는데도 20살의 나에게 싱가포르의 야경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보통 스무 명 정도는 태워야 운행하는 크루즈에 승객이 나 혼자라니, 단돈 1만원에 누리는 호사에 정신을 못차리던 나는 초라한 기다림은 잊은 지 오래였다.


이때부터였을까. 나에게 여행은 생각지 못하는 즐거움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자, 그에 마음 놓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게 되었다.


그렇게 2년 정도가 흘렀을 때 어머니의 응원과 아버지의 걱정을 뒤로 하고, 나는 스페인의 북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다. 당시의 나는 드디어 나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겠구나, 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가득했었다. 그리고 대개의 호기로운 자들이 겪는 다음 단계가 그렇듯 나 역시 좌절을 겪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언어에 대한 것이었는데, 기초반에서 배운 간단한 스페인어밖에 모르는 데다가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어로도 100% 수업을 들으려고 하니 이것 참, 당황스럽기 그지 없는 거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토론 방식의 수업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는 내가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여행을 가자는 결심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결론으로 이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패기롭게도 나는 수업이 있는 날에 여행일정을 잡았다. 교환학생으로 다니는 대학교는 일반 학생보다는 굉장히 너그럽기 마련인데 나처럼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첫 여행지는 마드리드였다. 마음은 굳게 먹은 뒤였지만 이걸 막상 교수님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막막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눈치만 살피다가 자료를 정리하는 교수님께 다가가 말했다.


- 저, 그러니까... 제가 마드리드로 여행을 갈까 하는데요. 그래서 수업을 좀...


멈칫, 교수님이 내 얼굴을 보시더니 이내 웃으면서 말을 꺼냈는데, 이 말은 내가 들은 멋진 말 상위권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샌 이국의 교수님은 마침 내 뒤에 있는 창을 가리켰다.


-인(내 이름은 발음이 어려워 인이라고 불렸다), 이 교실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려고 해요. 물론 정말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죠. 하지만 때로는 저 창 밖에서 더욱 중요한 걸 배우게 됩니다. 어떤 것들은 교실에서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잘 다녀와요, 마드리드.


와, 내가 방금 들은 게 청춘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온 대사인지, 내 앞에 서 있는 이 교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를 잠시동안 생각했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교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많이 없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아주 멋진 교수이자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조그만한 창 밖의 넓디 넓은 세상에서 어쩌면 무엇보다도 중요할 지 모를 것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 날 만약 그 교수님이 퉁명스럽게 혹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면 내 인생은 아마 아주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여전히 내 의견을 말하기 망설이고, 새로운 여행에 대한 걱정을 용기가 이겨내지 못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교수님의 진심어린 응원 덕분인지 그 후의 유학생활은 한결 수월했다. 그와 나눈 대화 이후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으며,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색은 이전보다 더 다채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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