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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Oct 14. 2021

[은행(ginkgo)꼬치는 은행(bank)에 없다!]

식담객(2016)

이른 아침 마지막 민방위 훈련에 나갔습니다.

속 시원하긴 한데, 이젠 민방위로도 쓸모 없는 퇴물이 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시작시간보다 10분 일찍, 동사무소 2층의 교육장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시작 시간에서 5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훈련통지서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오늘이 아니라, 모레랍니다.

지난 달 민방위본부 홈페이지 체크했을 땐 오늘로 나와 있었는데... ( -_-);;

노안이 왔나 봅니다. @_@;;


뭔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을 지나는데 꼬릿한 냄새가 맹렬히 코를 찌릅니다.

IS가 드디어 생화학무기로 한국에서 테러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개포동을?

개도 포기한 동넨데.


담장 앞 나무 아래 짓뭉개진 은행더미가 보입니다.

누런색 널브러진 속살 주변에 진액이 흥건합니다.

누군가 은행열매를 한 곳에 모아뒀는데, 큰 자동차가 그 위를 밟고 간 듯합니다.


참혹한 은행학살의 현장을 지나며, 불현듯 은행꼬치에 뜨끈한 대포 한 잔이 떠오릅니다.

1995년 봄, 군입대를 기다리며 휴학을 했습니다.

한푼이라도 벌어 가계를 도우려고, 지하철 2호선 신천역에서 신문을 팔았습니다.


스포츠연예신문의 인기가 하늘에 닿을 무렵이라, 장사는 잘 됐습니다.

선로 앞 한 평 남짓한 가판대에 앉아 있으면, 무료함에 지나가는 지하철 대수를 세기도 합니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공기가 혼탁해집니다.

보이지 않아서 느끼지 못하지만, 지하철역 안의 먼지량은 어마어마합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기침 때문에 밤새 잠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호프집 아르바이트 벌이가 시간당 2,000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닥에 뿌리 내린 듯 앉아 있는 일에 매시간 300원이나 더 준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온종일 좁은 공간에 앉아 신문을 팔고 매대를 정리합니다.

신문이며 잡지를 열중해서 읽어도, 시간은 더디게만 흐립니다.

스물한  청년은 맥주를 마시고 아리따운 이성도 만나고 싶지만, 일을 마치면  9시가 넘습니다.

그래도 토요일에는 여섯 시에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5월 어느 주말, 누군가 매대를 두드립니다.


"어이~ 대갈 장군, 맥주 마시러 가자!"


형입니다.

그 무렵 형은 군대에 다녀와, 광고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천역 새마을시장으로 향합니다.


지금과 달리 새마을시장 큰길은 노점이 가득 들어차, 국수며 오뎅을 팔았습니다.

잔치국수 한 릇씩에 꼬마김밥을 시킵니다.

십원짜리 동전도 소화시킬 듯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집니다.


"맥주 마셔야지~"


시장통을 지나 투다리에 들어갔습니다.

맥주란 말엔 설렘에 배어 있습니다.

새하얀 생맥주 거품에선 왠지 달콤한 크림맛이 날 것만 같습니다.

1학년 새내기 시절 학교에서 가장 존경했던 위인은, 생맥주에 통닭을 사주던 형이었습니다.

가장 두려운 사람은, 두부김치 하나에 소주를 서너 병씩 마시던 선배였구요.  


"생맥주 두 잔 먼저 주세요."


형이 주문메뉴를 바꿉니다.


"아니요, 생맥주 말고 하이트 세 병 주세요."


500cc 생맥주는 1천200원, 하이트 병맥주는 2천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형, 병맥주 비싼데..."


형이 빙긋 웃으며 말합니다.


"짜식~ 오늘은 우리도 병맥주 마셔보자. 여기요, 꼬치 하나 주세요."


모둠꼬치가 나왔습니다.

푸짐하고 다양한 꼬치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고기 사이사이에 파를 끼운 닭산적, 쫄깃한 염통과 모래집, 동글동글 깻잎과 소시지 베이컨말이...

술 한 모금에 꼬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소년시절을 추억합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휘청거릴 때마다 형은 내게 형이고, 벗이고, 아버지였습니다.


술잔을 부딪쳐 찌글찌글한 기억을 텁니다.

접시를 보니, 어느새 황녹색 알맹이를 꿴 꼬치만 하나 덜렁 남았습니다.


"형, 이거 먹어."


"아냐, 너 먹어."


"아니, 형이 형인데..."


그렇게 승강이를 하다가 결국 군입대가 예정된 아우가 꼬치를 듭니다.


"그런데 형, 이거 뭐야?"


"몰라..."


"그런데 나보고 먹으라고?"


“맛 이상할까봐.”


“내가 모르모트야? 엄마한테 일러줄 거야!”


“그럼 형이 먹고, 고통 받아야 해?”


서먹한 순간, 애틋한 형제애가 다시 한 번 움트는 밤입니다.^^;;


은행꼬치의 ‘은행’은 영어로 ‘ginkgo’입니다.

일본어 ‘ ‘깅코 서구에 소개됐습니다.

인삼의 영어단어가 ‘진셍’이 된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이순재 선생님이 모델이셨던 혈행개선제 ‘징코민’을 기억하시나요?

‘은행나무 추출물’이 핵심성분이었죠.



은행(銀杏)은 한자로 '은(silver) 은'자에 '살구 행'자를 씁니다.

오늘 아침까지 저축하는 ‘뱅크(bank)만 생각한 스스로가 한심합니다.


그런데 샛노란 은행열매가 왜 은일까요?

답은 씨에 있습니다.

은행나무의 ‘하얀 씨’를 보고 '은빛 살구'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살구(殺狗)는 '죽일 살'자에 '개 구'를 씁니다.

우리나라 옛 설화에서, 악을 쫓는 캐릭터인 방상시가 사람을 괴롭히는 괴물개를 처치합니다.

이 개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았는데, 그 나무의 열매가 바로 개를 죽였단 의미로 ‘살구(殺狗)’입니다.

살구나무는 졸지에 ‘개죽임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돼버렸습니다.

오늘부터는 살구를 마음 편히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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