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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Jan 19. 2022

[곱슬머리를 펴다] #1. 그해 여름

민주

퇴근길 중년 직딩의 모습은, 풀죽은 와이셔츠 깃처럼 늘어진다.

업무 피로와 사람 스트레스에 시들어, 남은 거라곤 먹이에 대한 갈망과 찌든 땀냄새뿐이다.

시원한 맥주생각이 간절하지만, 지난밤 무리해서 마신 술에 몸도 지갑도 허하다.

빨리 집에 가야 한다.

샤워하고, 밥 먹고, TV 앞에서 빈둥댈 수 있는 나만의 낙원으로.


집에 가까워질수록 피로는 쌓이고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새삼 달팽이가 부럽다.

집에 쏙 들어가기만 하면 출퇴근으로 진 빼지 않아도 되니까.


한두 가지 더 싱거운 생각을 마칠 무렵, 드디어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셔츠와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이번 여름은 정말 무덥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선다.

올해 들어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희끗한 곱슬머리를 빗어 넘기다가 불현듯 오래 전 여름이 생각났다.

최악의 폭서기로 기록된 그 해 여름은 올해보다 더 뜨거웠다.


1994년 6월,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학교 앞 생맥줏집에서 야간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학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근무하던 호프집에 내 또래 여자아이가 있었다.

민주, 단발머리에 얼굴이 하얗고, 웃는 눈이 예쁜 아이였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날 무렵, 우리는 서로 농담을 주고 받을 만큼 친해졌다.


유난히 무덥던 어느 날 초저녁, 아직 손님이 몰리기 전이었다.

그 아이와 함께 함께 빈 자리에 앉아 사이다를 마셨다.

머리카락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민주야, 넌 좋겠다, 생머리라. 난 곱슬머리 때문에 고민이야.”


“돈 내고 파마도 하는데, 웬 고민?”


“나도 찰랑찰랑 생머리라면 멋있을 텐데… 보글보글 라면머리라 여자애들한테 인기 없나 봐.”


민주가 나른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펴줄게. 요 앞에 화장품 가게 가서 머리 펴는 약 달라고 해.”


뜻밖의 친절에 잠시 의문이 생겼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밤 11시, 손님들이 거의 다 나갔다.

1994년에는 심야영업 규제가 있어, 모든 음식점은 밤 12시 이전에 문을 닫아야 했다.

대략 청소를 마치고 텅 빈 단체룸에서 곱슬머리를 펴는 작업을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의자에 앉아 민주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내 머리 구석구석에 약을 바른 민주는 부지런히 빗질을 해댔다.

파마약 냄새가 제법 독했다.

하지만 진지한 민주의 모습에 미안해, 내색할 수 없었다.


빗질이 이어지며, 그녀의 향긋한 머리냄새와 살내음이 다가왔다.

스레 가슴이 설레오기 시작했다.


‘내가 얘를 좋아했었나?’


고개를 갸웃댈 무렵, 등쪽에서 빗질을 시작했다.

바짝 다가와 움직이는 통에, 자꾸 몸이 내 등에 닿았다.


어느 순간 뭉클한 느낌이 찾아온다.

팔이 아니다.

가슴이다.

평소 보기보다 무척 풍요로운 느낌이다.

아찔함과 민망함 그리고 죄책감이 뒤엉킨다.

그냥 우연일 거라 생각한다.

그냥 열심히 빗질하다 보니 생긴 해프닝일 거라 믿는다.

그런데 이 느낌이… 좋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과 귀에도 숨결이 느껴졌다.

조금 거친 듯하다.

은근슬쩍 내 등줄기와 옆구리를 쓸어 내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몸을 맡긴다.

어느새 언제 폭발할지 모를 만큼 부풀어 오른다.

애국가 암송으로 몸을 달래보지만. 불안감에 조바심이 든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혼돈의 30분이 지나갔다.


다행히 별 탈 없이 곱슬머리 말살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내 자취방은 호프집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으니 속옷이 점액질로 엉망이다.


‘하아~ 이게 뭐야…’


스무 살의 나는 순진했다.

졸지에 흔들려 버린 스스로가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이튿날에도 민주와 별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스무 날이 지날 무렵, 그녀가 말을 건넸다.


"홍기야, 너 머리 곱슬거린다. 다시 펴야겠는데."


-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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