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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Jan 20. 2022

[곱슬머리를 펴다] #2. 애국가

Round 2

다시 한 번 머리를 펴자는 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지난번 겪었던 야릇한 위험이 떠오른다.

또 그런 혹독한 시련을 겪고 싶지 않다.

욕망 앞에 굴복할지 모르는 스스로가 못 미덥다.


하지만 모 여대 아이들과의 미팅이 며칠 뒤였던 터라, 이내 망설임이 다가왔다.

1994년은 생머리 사내들이 사랑받던 시절이었다.

겨드랑이 털처럼 꼬불거리는 머리로 미팅에 나가면, 나는 또 술값만 보태는 호구가 되고 말 거다.

서러움이 대답으로 이어진다.


"그래, 부탁할게."


그날밤 근무가 끝날 무렵, 빗질이 다시 시작됐다.

진한 파마약 냄새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이튿날부터 찰랑거릴 머릿결을 상상하니 웃음이 머금어진다.


하지만 잠시 후,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얼마 전 느꼈던 뭉클함이 또 다시 어깨에 일렁인다.

이내 지긋이 등마저 누른다.

예전보다 몸을 더 밀착한 것 같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민주는 내 등에 가슴을 부비며 일상생활을 물어본다.

마음도, 몸도 표류하기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녀도 나도 엷은 반팔 셔츠만 입어서, 감촉이 더 선명하다.

민주의 땀방울도 더 굵어진 것 같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주는 아이에게, 차마 좀 떨어지란 말을 하기 두렵다.


오늘은 비누냄새가 아니다.

향수를 뿌린 듯하다.

고혹적인 머스크향은, 민주를 친구가 아닌 여인으로 느끼게 몰아간다.

목덜미에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계속된 자극에 조절에 한계가 오고 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다급한 말에 그녀가 장난스런 눈빛으로 대답한다.


"안돼, 지금 멈추면 머리 망가져."


"그래도 너무 급한데..."


"그냥 참아."


빗질이 더 거세다.

내 상황을 모르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난 이제 통제불가 상태에 이른 것 같다.

애국가를 암송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동해 해수욕장 비키니 여인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몸매가 떠오른다.

백두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찰나 후 내 운명이 그려진다.

달아오른 욕망의 불길 앞에선, 만병통치약이던 애국가도 부질없는 저항일 뿐이다.

다급하게 외친다.


"떨어져!"


간신히 대폭발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잠깐만 나 생각할 게 있어."


"어… 그래?"


당황한 표정으로 민주가 자리를 떠난다.


'아, 이거 뭐라고 둘러대지?'


멈추지 않던 팔다리의 떨림이 멎고 갈등과 번민의 여운이 사그라든다.

민주가 다가온다.


"홍기야, 이제 괜찮아?"


"어? 어... 그게..."


쭈뼛대며 더듬거리는 내게, 민주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내가 머리 펴주는데, 넌 나한테 해줄 거 없어?"


가쁜 숨에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한다.


"어... 다음주 점심 때 맛있는 거 사줄게. 뭐 좋아해?"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제안을 한다.


"나 오늘 엄청 목 말라. 머리 다 펴면 맥주 한잔 사줄래?


-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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