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풀 Jan 22. 2022

[곱슬머리를 펴다] #3. Midnight Blue

시험 전날 밤

망설여진다.

기말고사 기간이다.

내일 오전에 3학점짜리 언어학개론 시험을 본다.


"저 미안한데, 나 내일 시험이라 오늘은 좀 어려워. 시험 끝나면 사줄게."


그녀의 표정에 실망스런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래? 할 수 없지."


돌아서는 옆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측은한 마음이 인다.


"민주야, 잠깐만. 그럼 딱 500 한 잔씩만이다."


민주의 표정이 환해진다.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선다.


"정모랑 현주도 같이 가는 거지?"


함께 일하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 얘기를 꺼내자, 그녀가 잠시 멈칫한다.


"아, 걔네 바쁜가 봐. 오늘은 우리끼리 마시자."


시계가 11시를 가리킨다.

12시면 모든 음식점이 문을 닫는다.

서둘러 가까운 술집을 찾는데, 민주가 말을 꺼낸다.


"요기 근처에 1시까지 하는 집 있어."


안내 받은 생맥주집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가게풍경이 고즈넉하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처져있고, 조명은 좀 어둡다.

예전에 카페였던 자리 같다.


"사장님, 여기 500 두 잔이랑 '건오' 한 마리 주세요."


주문하는 내 말에 그녀가 쿡쿡 웃는다.


"너 알바군기가 확실하구나?"


알바용어로 마른 오징어를 ‘건오’라고 부른다.

사소한 표현에 웃음 짓는 민주가 새삼 귀엽다.

발그레한 불빛이 더해지자, 얼굴빛이 한 층 더 새초롬해 보인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킨다.

6월의 열기와 손님들의 500 뺑뺑이(손님 6~7명이 생맥주 500cc 한 잔씩만 연이어 주문하는 공 물어오기 훈련)에 쌓였던 가슴의 울화가, 시원스레 씻겨 내려간다.

맥주에 살짝 입술만 적신 그녀가 말을 건넨다.


"나 너 처음에 별로였다."


"응? 왜? 하긴 나도 나 별로야."


무심코 나도 대답한다.


"니가 왜? 목소리도 좋고, 말도 재밌게 하고, 너 정도 외모면 좋아할 여자 많을 텐데?"


놀리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싼다.


"가난해. 집안형편이 빠듯해서 내가 학비 벌어야 해.”


민주가 답답한 표정으로 따지듯 말했다.


"우리 나이에 아르바이트 하는 건 자랑스러운 거야!


“머리도 크잖아, 엉덩이도 크고~ 게다가 딱히 꿈도 없다."


“머리 큰 게 어때서? 그리고 꿈은 차차 만드는 거야. 내가 너 별로였다고 말한 건 니가 처음에 나한테 무뚝뚝해서였어."


갑자기 목이 마르다.

남은 맥주를 들이붓곤, 그녀에게 묻는다.


"그런데 지금은?"


잠시 망설이던 민주가 말을 잇는다.


"지금은 알바 올 때 너 기다려져. 늦게 오면 걱정스럽고."


읍면리 단위 지역에서 남중과 남고를 졸업한 스무 살 촌놈.

여성의 심리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아니, 눈치가 없다.

멋쩍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던진다.


"그래, 고마워. 그런데 그건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말이잖아?"


그녀가 아무런 말 없이 내 눈을 바라본다.


"나 니 옆에 앉아도 돼? 여기 선풍기 바람 너무 세다."


융통성이 버뮤다 삼각지대에 처박힌 촌놈이라지만, 이 정도면 생각이 깊어진다.


"어… 그래."


그녀가 옆에 앉는다.

머스크향도 함께 다가온다.

맥주를 반쯤 비우곤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댄다.


"오늘 너 머리 펴주느라고 많이 피곤한가 봐. 나 잠깐 기대도 되지?"


둘 다 반팔셔츠 차림이라 맨살이 팔에 닿는다.

부드럽고 서늘한 살결이 손길처럼 느껴진다.


"나 잠깐만 눈 붙일게. 어디 가면 안돼."


채 대답도 하기 전에, 팔짱을 끼고 더 바짝 다가온다.

애써 억눌렀던 욕망이 동학혁명 농민들마냥 다시 봉기를 일으키고, 우둔한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가슴이 다시 팔에 느껴진다.

냇물에 빠진 편지지에 물이 스미듯, 나도 모르게 입술이 그녀에게 향한다.

가만히 볼에 입을 맞춘다.

새근대는 숨결에 후리지아향이 아련히 실린 것만 같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머문다.


'내가 뭐하는 거지?'


이내 가슴에 불안감이 몰아치며, 살며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되돌린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다가온다.

그 입술이 내 입술을 감쌀 것만 같다.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당혹스럽다.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벅찬 순간이 계속된다.


나도 모르게 오른팔이 그녀의 어깨를 안고, 몸과 몸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냥 그렇게 입술이 닿았다.

멈춘 시간 속에 'ELO'의 'Midnight Blue'가 흐른다.


I will love you tonight

and I will stay by your side

Loving you, I'm feeling midnight blue


어깨를 감쌌던 손이, 담쟁이 넝쿨처럼 나아가오른다.


- 다음편으로

https://youtu.be/9Bc7aA-PyGE


작가의 이전글 [곱슬머리를 펴다] #2. 애국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