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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Feb 14. 2022

[발렌타인데이의 발렌타인]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 때였나요?"


만화 '슬램 덩크' 팬이라면, 가슴 벅차오르는 대사입니다.

지역의 무명팀 북산(상북: 쇼호쿠)이 파란을 일으키며 전국대회에 진출해, 최강팀 산왕(사노)과 팽팽한 대결을 펼칩니다.

주인공인 1학년 강백호(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경기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벤치에서 대기하다가, 출전을 만류하는 감독에게 단호히 외칩니다.


" 지금입니다!"


되는 대로 살아가던 불량청소년이 예쁜 이성에게 다가가려고 농구부에 기웃대다가, 자신도 몰랐던 재능과 가능성을 인정받습니다.

하나 둘 노력하고 깨달으며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삶에서 가장 뜨거운 순간을 맞습니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왔었습니다.

그해 2월 14일은 유난히 설렜습니다.

이전까지 내게 발렌타인은 항상 그저그랬습니다.

읍면리 지역에서 남중, 남고를 거치며, 연애감정은 싹조차 틔워보지 못했습니다.

대학은 여학생 비중이 절반 이상인 학과로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찌글찌글 모난 성격과 그저 그런 이목구비 덕분에, 내가 머물던 자리는 항상 '로맨스 향소부곡'이었습니다.


졸업 후 연애란 걸 해보고 싶었지만, 직장인의 연애는 간판이 참 중요하다는 교훈만 얻었습니다.

그해 발렌타인엔, 돼지머릿고기 안주에 참이슬 여러 병을 참수해 형장의 이슬로 증발시켜버렸습니다.


이듬해 규모가 큰 회사로 옮기고,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명함을 내밀 때 나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랐습니다.

청춘들이 어울리는 자리로 자주 초대받았고, 만남 제안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맞는 발렌타인 데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 학교 출신들이 잘나가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저도 결혼은 거기에 맞는 사람이랑 하라세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소개팅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꺼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커다란 머그잔 앞에 앉은 청년 신대두는 머쓱하게 웃습니다.


“네, 부모님께서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 학교 너 입학할 때, 대량 미달사태 난 거 기억한다.)


자리를 주선한 선배와 며칠 전 나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선배는 내가 만날 사람이 중요한 V.I.P.의 처제라며, 얘기만 잘 들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심지어 데이트 비용도 다 내주겠다며 카드를 건넸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형이 돈까지 내줘요? 좀 이상한데?”


“그럴 만하니까 그래. 맛있는 거 사주고, 기분만 잘 맞춰주고 와. 나중에 형이 근사하게 한잔 살게.”


‘이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두고 보자 이 선배님아!’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자화자찬을 이어갑니다.

본인의 지성과 교양부터, 집안 사람들의 사업과 차종까지 참 다양합니다.

형부가 새로 뽑았다는 BMW 배기음 성대모사에 추임새를 넣고 있는 스스로가 웃깁니다.


슬쩍 시계를 봅니다.

만난 지 20분 지났으니, 20분만 더 버티고 일어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음이 퍽퍽해 어디 가서 술이나 퍼야겠습니다.

그때까지 밝은 표정으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버티자... 면도칼바람 불던 연병장에서 연대장 영감의 훈화 말씀도 한 시간이나 버텼던 나다!’


“제가 좀 늘씬해서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은 다들 큰 편이었거든요. 180cm 아래는 그쪽이 처음이네요.”


“아이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클걸. 죄송해서 어쩌죠?” (어머니, 180이 안 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식 웃는 그녀의 표정에, 좋아할 만한 말을 이어갑니다.

원래 칭찬이란 건 상대방이 뿌듯해 하는 부분을 찬양할 때 약발이 받는 법입니다.


사실 그녀는 예쁩니다.

늘씬한 몸매에 베티 데이비스처럼 크고 반짝이는 눈망울, 거기에 눈부신 싸가지...


“길거리 캐스팅 제안도 자주 받으셨겠어요? 외모 때문에 불편한 일은 없으셨어요?”


이제야 자신의 미모를 알아봤냐고 나무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합니다.


“뭐, 어디 가나 항상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해요. 길거리에서 연예기획사 명함은 몇 번 받았었구요.”


“와, 오늘 일기장에 써야겠어요. 올해 들어 가장 예쁜 여자 만났다고.” (집 앞에 왕 굵은 천일염 뿌리는 날이라고.)


“어머, 일기도 쓰시네요? 안 그래 보이는데.”


“하하, 이런 날엔 꼭 써야죠.” (그 일기장 제목이 ‘데쓰노트’다. 김세연, 김세연, 김세연. 100번은 쓰고 잘 거다. 그것도 빨강색 싸인펜으로! 그 옆에 너 소개한 선배놈 이름도 쓸 테다.)


어느덧 시간은 40분을 넘었습니다.

이제 한 번 더 그녀의 매력을 치하하고, 내가 당신과 어울리기엔 부족해서 아쉽다는 인사를 건네면 미션은 끝입니다.


“술이나 한잔 해요.”


앗, 그녀가 먼저 얘기를 꺼냅니다.


“네?”


생각지 못한 얘기에 머리가 뒤죽박죽입니다.


‘내가 맘에 안 드는 게 분명해 보였는데, 웬 술? 술을 좋아하나? 아니면 집에 쌀이 떨어졌나?’


토요일 오후 네 시, 해가 저물려면 아직 좀 남았습니다.

문을 연 술집이 눈에 띄지 않아 헤매다가, 작은 일본식 선술집을 발견해 들어갑니다.

대충 빨리 먹고 빨리 집에 보내야겠다는 마음에, 소주랑 가장 빨리 되는 안주를 주문합니다.


“대두 씨 얘기 좀 해주세요. 저만 말하려니 힘들어요. 내 스타일이 맘에 안 들어서 그래요?”


그녀가 푸념하듯 얘기합니다.

말투가 아까보다 조금 부드럽습니다.


“예뻐요. 올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말, 진심입니다.” (하지만 네 얘기도 진심 짜증나.)


그 말에 멋쩍어졌는지 그녀가 소주를 털어넣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안주도 아직 안 나왔는데.”


“빨리 집에 가고 싶잖아요? 그래서 빨리 마실래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 술 좋아해요.” (너 무속인이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일류 대학을 나오지도, 키가 크지도 않은 나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혼자만 마시게 할 수 없어 같이 잔을 부딪칩니다.

크... 공복의 소주는 찰나의 천국을 선물해 줍니다.


시덥지 않은 얘기를 안주 삼다 보니, 어느새 두 병째 소주를 주문합니다.

살짝 취기가 오릅니다.

낮술을 마시면 태양광선이 알코올분해효소의 분비를 막아, 부모님 식별마저 저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녀도 얼굴이 노을빛으로 타오릅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는데...


“나 싸가지 없죠?”


“에이... 뭘요. 가식적인 것보단 솔직한 게 나아요.” (너도 아는구나.)


“그런데 왜 솔직하지 못해요? 맘에 안 들면 안 든다,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랬다간 조만간 내 선배가 예리하거나 둔탁한 고체로 내 머리통을 후려칠 거다.)


그녀가 술잔을 다시 기울입니다.

이거 자칫하다간 집까지 바래다 줄까봐 두렵습니다.

잽싸게 마시고 얼른 취해버려야겠습니다.


노을빛이 사라진 하늘엔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세 병째 소주도 절반 가까이 비었습니다.

노가리 한 접시에 많이도 먹었습니다.

오르는 취기에 긴장감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갑니다.


“그런데 왜 술 먹자고 그랬어요? 세연 씨야말로 나 별로잖아요?” (이 술쟁아!)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도도한가 궁금해서 그랬어요. 왜요? 집에 가게요?”


“뭐가 도도해요? 무슨! 내가 얼마나 깍듯하게 대했는데~” (오늘 너 만나서 내가 집에 들고 갈 간이랑 쓸개를 못 찾겠다!)


“다른 남자들은 내 관심 끌려고 있는 자랑 없는 칭찬 자자한데, 대두 씨는 묻는 말에만 대답했잖아요. 그것도 짧게!”


이 사람, 뜻밖에 귀엽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이 밉지 않습니다.


“내가 대두 씨 얘기 좀 해달라고 했는데, 왜 나만 말하냐고? 그러니까 홀짝거리다가 이렇게 됐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비친 달빛이 곱습니다.

예쁜 여자가 귀여워지면 가공할 파괴력이 생긴다는 걸 깨닫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서비습니다. 속도 좀 채워가면서 드세요.”


사장님이 서비스 안주로 달걀부침을 주십니다.

석쇠 접시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 노른자와 흰자의 어울림이, 왈츠처럼 매혹적입니다.  


“대두 씨, 그거 알아요? 계란이 노른자가 닭이 되면 노란 닭이 되고, 흰자가 닭이 되면 하얀 닭이 돼요!”


“에이, 노른자가 병아리 되는 거죠.” (술 취했냐?)


“무슨 소리에요, 나 학교 어디 나온지 알잖아요?”


“학교를 어디 나왔든, 병아리는 노른자에 있는 배아가 자라서 부화하는 거에요.” (생물시간에 식물만 배웠냐?)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래? 흰 자는 흰 닭, 노른자는 노란닭도 몰라요? 우리 집안 식구들 다 잘나가요!”


아, 살살 짜증이 올라옵니다.

잠시나마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처량합니다.

아무리 선배 부탁이라도, 이건 시시비비를 가려야겠습니다!


“그럼 오골계는 뭔가요? 흰색도 노란색도 아니잖아요.” (이 까막눈 같은 자야!)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레 대답합니다.


“혹시... 까만자?”


가게 안에 잠시 정적이 가득합니다.

옆 테이블 주문을 받던 사장아저씨와 손님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봅니다.


얼굴엔 쪽팔림이 소용돌이치는데, 입에선 폭소가 터져나옵니다.


“푸핫핫핫, 으하하하, 우헤헤헤~!!!”


집에 오는 길, 선배에게 전화가 옵니다.


“야, 너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선배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뭔 소리냐!!!”


“난 방금 전이었습니다.”


“너 서른 살 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 몰랑! 형 카드로 발렌타인 한 병 사먹는다. 안주는 오골계!”


*St. Valentine’s day의 유래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군단의 병사들은 탈영 우려 때문에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어떤 사제가, 몰래 사랑하는 연인들의 결혼을 성사시키다가 적발되어 처형 당합니다.

 사제의 이름은 발렌티노(Valentino).

그의 시신이 묻힌 2월 14일이, 발렌타인 데이로 기념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발렌티노의 뿌릿말인 라틴어 valentia는 힘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힘이 목숨을  용기를 주었나 봅니다.


이름이 비슷한 위스키 발렌타인(Ballantine’s) 하이랜드의 켈트족에서 왔답니다.

그들이 믿었던 불의  ‘벨레누스(Belenus)’ 다른 이름이 ‘(Ba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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