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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May 24. 2022

[바둑, 밭 위의 Stone Wars!]

어릴  배웠다면 지금 삶이 어땠을까 궁금해지는 취미가  가지 있습니다.

수영, 피아노, 바둑입니다.

저는 다 할 줄 모릅니다.

 

수영을 못 합니다.

"꼬로록~" 맥주병이 아니라, 그냥 "쑤욱~!" 벽돌입니다.

수퍼맨이나 박태환이나, 제겐 동급 영웅으로 보입니다.

전 둘 다 못 하니까요.

 

피아노에 얽힌 추억도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학생회실에서 복학생 선배의 기타 연주에 맞춰 강산에의 '라구요'를 흥겹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평소 학생회실에 오지 않던 여자선배가, 말을 건넸습니다.

 

"Extreme의 'When I first kissed you' 불러줄래? 네 목소리랑 잘 어울릴 것 같아, 파아노 연주도 하면 멋있을 거야."

 

흠모했지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어 아쉽던 예쁜 누나였습니다.

한 음절 한 음절이, 후리지아 내음이 밴 듯 향긋하게 들려왔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 어떤 말을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남성적인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 피아노 못 치는데요."

 

젠장, 천하제일 어리바리!

내겐 순발력도 재치도 가뭄콩이었습니다.

바둑을 잘 뒀더라면 어땠을까요?

 

바둑을 잘 두던 벗이 있었습니다.

진영균, 아마추어 5단으로, 보통사람들 중엔 적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학창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습니다.

 

영균이의 생각과 말들은 종종 마음에 울림을 주었고, 나는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바둑이 덕분인 것 같아."

 

내가 아는 바둑의 규칙은, '상대방의 돌을 내 돌로 에워싸서 잡고, 그렇게 내 집을 상대방의 집보다 더 넓게 키우면 승리한다' 정도였습니다.

아는 게 거의 없던 내게도, 주어진 상황을 분석하고 다양한 변수를 예상해 준비하는 바둑은, 뭔가 심오한 깊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바둑이 무슨 뜻이야?"

 

"옛날엔 '밭독'이라고도 불렀대. 경작하는 밭(田)처럼 줄이 그어진 바둑판 위에, 돌을 놓아서 영토를 넓혀가는 놀이야. 독은 돌을 가리키는 옛말이라네."

 

"멍멍이 바둑이는 바둑이랑 무슨 관계야?"

 

"바둑의 흰 돌이랑 검은 돌처럼, 몸에 하얗고 검은 무늬가 있는 개를 바둑이라고 불렀다네. 바둑을 '오로(烏鷺)'라고도 불렀는데, 까마귀와 백로가 대결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럴 거야."

 

"넌 모르는 게 뭐야?"

 

2016년 3월, 천재기사 이세돌이 구글의 AI 프로그램 알파고와 대국을 벌이는 중계방송을 보면서, 영균이가 생각났습니다.     

 

"'알파 고(Go)'의 고는 '바둑 기(棋)'의 바둑의 일본식 발음이잖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게임인데, 왜 중국어가 아니라 일본식 한자발음을 붙인 걸까?"

 

"세계에 바둑을 전파한 나라가 일본이라서 그래. 유도(柔道)를 주도(judo)라고 부르고, 인삼(人蔘)을 진셍(ginseng)이라고 부르는 거랑 마찬가지겠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러면 중국어로 바둑의 뜻은 '밭 위의 돌싸움'이 아니겠네?"

 

"맞아. 중국어로는 웨이치(围棋)라고 불러. '에워쌀 ()' '바둑 ()'. 여기서 () 윷놀이  때처럼 놀이판에 캐릭터 대신 말을 놓아서 하는 게임이란 뜻이야. 말은 야생마나 적토마가 아니라, 게임 캐릭터 칩이고."

유레카(eureka)!

이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상대방 말을 포위해서 먹는 놀이'란 뜻이었어?"

 

"응, 이제 쉽지? 중국 요순 시대 임금이, 좀 아쉬웠던 아들의 사고력 발달을 위해 열심히 가르쳤던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이해하자."

 

"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많이 썼던 말인데, 이제서야 뜻을 알았네. 우리나라 바둑은 판과 돌의 모양에서 왔고, 중국 웨이치는 게임의 방식에서 온 거란 말이지?"

 

영균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넌 대체 모르는 게 뭐야?"

 

사실 알파고 이야기는 제 머릿속 상상입니다.

오랫동안 영균이의 소식을 모릅니다.

 

어느날 갑자기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곧 연락이 올 거라고 기다리다가 어느새 12년이 흘렀습니다.

오랫동안 곁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 소식이 끊기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믿었었나 봅니다.

바둑을 배워뒀더라면, 이런 상황에 대비해 가족들의 연락처라도 미리 알아뒀을지도 모르겠단 아쉬움이 남습니다.

 

혹시 내게 서운했던 일이 있어 찾지 않는 거라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즐겁고 건강하기만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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