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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Jun 11. 2022

[화장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보너스> 세계의 화장실 미화어들


1998년 3월, 복학생 신대두의 등굣길은 부산합니다.

입대 휴학 후 3년 만에 돌아온 학교.

IMF 시국이라 착잡하지만, 바쁜 벌꿀에겐 슬플 겨를이 없습니다.

술 풀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복학생들 모두 형편이 빠듯해, 순댓국집에서 술국 한 그릇에 소주를 두세 병씩 마셨습니다.


“건강은 젊어서 챙겨. 나이 들면 속병이 고질병 돼.”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의 폭음을 나무라시며 뚝배기에 국물을 채워주셨고, 가끔 머릿고기나 순대도 썰어주셨습니다.

어떤 날엔 값비싼 맥주도 그리워졌습니다.

그럴 땐 후문 LG25에 들러, OB곰탱이와 농심새우깡패 친구들과 상봉해, 학교 잔디밭으로 향했습니다.


그랬던 다음날엔, 등굣길이 서커스 공중곡예처럼 위태롭습니다.

숙취는 ‘비의도적 장운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화장실 소환특급 3대장으로, ‘찬바람’과 ‘담배연기’, ‘장 진동’을 꼽습니다.

과음한 다음날엔, 배가 뜨시게 입고, 흡연지대를 피해, 살금살금 걷는 게 슬기롭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노크 없이 들이닥칩니다.

꿀술에 젖었던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해장에 좋은 꿀을 미리 소주에 타마시면 속이 편할 거란 궤변에, 친구 자취방에서 열광하며 들이붓던 벗들이 야속합니다.

정작 꿀술은 제가 만들었던 기억이…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매섭습니다.

버스정류장엔 골초 아저씨들이 왜 그리 북적대는지~

설마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버스가 가다 서다 덜컹댑니다.

신호가 옵니다.

지옥문이 열리고 저승안내 도우미가 고개를 빼꼼 내밉니다.


위태로울 땐 신속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맥가이버 주제음악에 성우 배한성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지. 이 주정뱅이 녀석아!”


쳇!

급히 버스에서 내려, 근심을 내릴 곳을 찾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한 번 갈아타던 정류장입니다.

바로 앞 지하철역사 안으로 향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걷습니다.

08시 화장실 줄이 구렁이 몸통처럼 길게, 바깥 통로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털썩~!

절망은 집념을 허뭅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미션 실패 시 벌어질 참담한 현실이 그려집니다.


플랜B로 갑니다.

살짝 속도를 높여 지상으로 올라와, 그럴 듯한 건물을 찾습니다.

하지만 화장실마다 두툼한 자물쇠가 버티고 있습니다.

싸늘하게 나를 외면합니다.

한 곳 한 곳 발걸음을 돌릴 때마다, 상상했던 불안은 현실 속 장운동을 촉진합니다.

이렇게 스물넷 복학생의 미래가, 정화조로 침몰하고 마나 봅니다.

고통과 절망에 벽에 기댄 채, 종말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학생,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면 얼른 구급차 불러줄게요.”


짙은 남색 점퍼에 이파리가 수놓인 모자.

방금 허탕치고 나온 건물의 관리인 아저씨입니다.


“선생님, 제가… 배가, 배가…”


“어이쿠, 얼른 따라와요. 문 열어드릴게!”


눈물이 날 듯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쇼생크탈출이나 삼일 만세운동의 한가운데 선 듯합니다.


“철컹”


싸늘하기만 했던 철문이, 어서 오라며 등을 토닥입니다.


“학생, 담배 피워요?”


“죄송한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얼른 이거 가져가요!”


휴대용 화장지와 날씬한 담배 한 개비를 쥐어주십니다.

급할수록 신중하게, 침착하게, 폭탄을 해체하듯 작업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극복!


그제서야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도라지 한 개비에, 세상이 평화롭게 보입니다.


화장실에서 나와 아저씨를 찾습니다.

5분 남짓 기다리다가 등교시간에 쫓겨, 버스정류장으로 향합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아저씨를 볼 수 없었습니다.


몇주쯤 지날 무렵 등굣길 버스 안, 건물 앞을 청소하시는 아저씨 모습이 보입니다.

급하게 내려 달려갑니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그때 그 청년? 또 배 아파요?”


“아뇨, 오늘은 은혜 갚으러 왔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아저씨 손에 도라지 담배 한 갑을 쥐어드리고, 마침 온 버스에 오릅니다.

세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화장실은 매일매일 천국과 지옥을 잇는 통로인가 봅니다.^^*



<참고> 화장실을 가리키는 표현들


‘화장실’처럼, 원색적인 뜻을 우회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수사법(修辭法)을 미화법(美化法: beau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활용하니, 이번 기회에 한번 둘러보시라고 모아봤습니다.^^*


1. 한국어

- 화장실(化粧室: 변화할 화, 꾸밀 장, 방 실): 단장하는 방

- 해우소(解憂所: 풀 해, 걱정 우, 곳 소): 근심 푸는 곳


2. 중국어

- 화장간(化妆间): 화장실과 대동소이. 실만 공간을 뜻하는 간으로 대체. 단장하는 공간

- 세수간(洗手间: 씻을 세, 손 수, 공간 간): 손 씻는 공간


3. 일본어

- 오테아라이(お手洗い: 오 ~님, 테 손, 아라이 씻음): ‘손 씻는 방’님


4. 영어

- restroom: 한숨 돌리는 방

- W. C. (water closet): 벽장으로 알고 있는 closet의 뜻은 ‘작고 좁은 방’. 여기서 water는 수세식 변기를 가리킴

- lavatory: 씻는 곳. 라틴어 lavare(to wash)

- toilet: 천조각. 과거 공중화장실이 없던 프랑스 도심에 간이 화장실을 제공하던 서비스 직업인들이 있었음. 이들은 망또같이 긴 옷을 걸치고 변기용 양동이를 들고 다녔는데, 용변 보는 사람을 천으로 둘러막아 행인들로부터 가려줌

*상류층의 ‘dressing room’ 테이블에 천조각이 깔려서 붙은 이름이란 유래설이 더 보편적입니다.


5. 프랑스어

- toilettes(뚜알레뜨): 영어 토일렛의 뿌리

- sanitaire(싸니떼허): 보건의, 위생의, 급배수(給排水: 물 받고 빼냄)가 되는. 건강을 뜻하는 라틴어 sanus에서 유래


6. 독일어

- die Toilette(디 투알레터): 천조각(영어 toilet 참조)

- das Badezimmer(바데지머): 욕실


7. 스페인어

- cuarto de baño(꽈르또 데 바뇨: 꽈르또 방, 데 ~의, 바뇨 목욕): 목욕실

 - cuarto de aseo(꽈르또  세오: ,  ~, 아세오 단장): 단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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