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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Jun 26. 2022

[육개장, 짬밥천국의 성자]

죄수식단보다 못한 병사짬밥

1995년 가을부터 26개월 동안 국방부 자산으로 머물렀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국방색 옷을 입고, 애인 같은 M-16 소총도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군대 다녀온 이들이 'M16 라이플'을 '애무16'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영어 공부가 모자라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우, 저질!)


20대 초반의 에너지는 혈기를 넘어 광기에 가깝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삽질과 갈굼에 굴러도, 룰라와 비비에 열광할 에너지는 남아있었습니다.

그 원천은 바로 왕성한 식욕과 소화력에 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복무(복역?)하던 논산훈련소의 식단은 참 안쓰러웠습니다.

취사병 10여 명이 2,300명분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식재료를 정성스레 다듬고 맛깔스럽게 조리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타오르던 청춘들은 십 원짜리 동전마저 씹어삼킬 듯한 소화력을 보유하고도, 식판을 바라보며 그늘 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음식쓰레기가 남았고, 이 잔반(殘飯: 남을 잔, 밥 반)은 딸딸이(문화어: 경운기)에 실려, 인근 농가의 돼지와 닭을 살찌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먹고 남은  '잔반(殘飯)'  모르고 따라 부르다보니, '짬밥'으로 발음되었습니다. 다리가 얽힌 낙제어(絡蹄魚: 얽힐 , 발굽 , 물고기 ) 낙지가  것과 비슷한 경우 같습니다. 복무한 기간이 길수록 남긴 잔반량도 많아, 군경력 '짬밥'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예문) "내가 남긴 짬밥에, 너 같은 이등병 1개 분대는 넉넉하게 묻혀 죽는다!"


그래도 그 '잔반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한 성자가 계셨으니, 그 분의 존함 '육개장'이었습니다.

얼큰하고 깊은 국물에 푸짐한 고기 건더기, 여기에 당면과 채소와 달걀이 어우러졌습니다.

그나마 외부세계에 가장 가까운 '사제'의 맛을 선사한 국님이셨습니다.


육개장이 나온 날 아침은 설렜습니다.

군기 바싹 든 이등병부터 귀찮다고 아침 거르는 말년병장까지, 모두의 표정에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우정의 무대’가 움텄습니다.


이런 '육개장'을 육계장으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

아마, 고기 육(肉)에 닭 계(鷄)를 연상했기 때문일 겁니다.

육개장의 '육'은 '고기 육' 자가 맞습니다.

장(醬)은 고추장이나 된장 같은 발효소스 '장'입니다.

'장국'이란 말은 '장을 넣어 끓인 국'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가운데 '개'는 어떤 한자를 쓸까요?

'개'는 한자가 아닙니다.

네, '멍멍이', '땡칠이', '누렁이'가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조상들은 육류 섭취 기회가 적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뙤역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밭을 매고 논을 갈려면, 채소가 아닌 육류 특별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축으로 '보양음식'을 끓여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그 재료는 주로 개였습니다.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장국'이었습니다.

‘개고기를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이라는 의미였죠.


그런데 지체 높은 양반들께서는 체면과 위신 때문에 개를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대신 쇠고기를 비슷한 양념으로 끓인 국이 바로 '육개장'입니다.

쇠고기(肉)를 넣어 끓인 개장국이란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육개장국'이 되겠지만, 너무 길어서 육개장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짜장면을 짜장, 물냉면을 물냉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닭개장은 뭘까요?

닭을 넣어 끓였으니 닭계장(닭鷄醬)이라고 유추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개장'을 씁니다.

닭개장은 '닭으로 만든 개장국'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점심엔 육개장이 당길 것 같습니다.

대파천지 육대장이나 짠개장 이화수 같은 유사육개장 말고, 결대로 찢은 고기에 칼칼한 듯 부드러운 국물이 어우러진 진짜 육개장이 그립네요.

서울에 그런 육개장 있는 집 아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사진설명: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 분식집의 유사 육개장. 가격은 진짜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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