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쾌락이 그 쾌락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성적이 추락했습니다.
불운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처럼, 이런 저런 찌글찌글한 상황들이 뭉쳐서 들이닥쳤습니다.
그런 배경을 떠나, 공부 자체가 짜증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이해를 못 했습니다.
국어책에는 은유법, 돈호법, 우유체처럼 뜻 모르고 적어놓은 용어들이 가득했습니다.
지구과학의 적란운이나 생물의 리보솜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용어의 뜻도 모르고 외우는 지식은, 모래 위의 누각처럼 쉽사리 허물어졌습니다.
교육에선 스승의 역할이 50%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습과 복습은 이해를 전제로 많고 적게 적용됩니다.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려면, 단어의 뜻과 개념을 명확히 알려줘야 합니다.
여기에 설명의 스토리 구조를 갖추고 어조의 고저장단을 배합하면, 이상적인 전달과 공유가 이뤄집니다.
그래서 좋은 학교와 스승을 찾아 이사를 하고 유학을 떠나는 건, 우리나라만의 문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 시절엔 그분들도 그런 교육을 받고 교단에 서지 못했으니까요.
지금은 아니라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가장 폭폭했던 과목은 국민윤리였습니다.
초중교 시절 배웠던 도덕의 연장이 아니라, 사실상 ‘고급 철학’이었습니다.
삼국지나 서유기를 통해 귓동냥했던 동양철학과 달리, 이데아나 스토아학파는 단어의 해석부터 버거웠습니다.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도 드문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반복해서 암기했던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나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는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가, 군대에 가는 꿈을 시리즈로 꾸었습니다.
밤새 쾌락과 고통이 공존했습니다.
출근길 버스 안, 문득 궁금증이 스멀거립니다.
산에서 느끼는 정취와 운동의 즐거움은 쾌락인데, 평소보다 무리해서 생긴 근육피로는 고통입니다.
반대로 건강한 몸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산에 올랐다면, 이건 쾌락인지 금욕인지 아리송합니다.
잊혀졌던 이름 ‘에피쿠로스’와 ‘아타락시아’가 떠오릅니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목표 ‘아타락시아(ataraxia)는 without을 뜻하는 ‘a’와 방해와 혼란을 의미하는 ‘tarattein’이 혼합된 말입니다.
‘평정심’입니다.
처음엔 쾌락이란 낱말에 대한 선입견으로, 에피쿠로스는 문란하게 살았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빵과 물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는 지론을 가질 만큼, 그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만을 추구했습니다.
오히려 삶을 병들게 하는 쾌락을 절제하고 철학적 탐구에 매진하는 생을 보냈습니다.
지난번 끄적댔던 법가의 스승 한비자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배층에겐 엄격하고 평민에겐 너그럽길 주창했던 한비자의 법 이상이, 오늘날엔 절대적 순종을 강요하는 통치이념으로 오해됩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도, 먼 훗 세대인 우리에겐 본질이 비틀어져 인식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궁금할 땐 찾아봐야 하나 봅니다.
뜻밖의 감동을 선사한 철학자 에피쿠로스.
그의 이름은 epi(upon)와 curro(run)로 이뤄졌습니다.
‘더 위로 달리는 사람’이나 ‘달림의 위를 추구하는 이’ 정도가 떠오릅니다.
정확한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심장엔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 멋스런 분으로 저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