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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Nov 16. 2024

[이젠 안녕]

X세대의 노래방 이별가

1992년 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리기 몇 달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노래방에 발을 디뎠다.


엄청난 감동이었다. 내가 가요톱10에 나오는 인기가수들처럼 화려한 반주에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그전까지 기껏해야 학교 음악시간에 선생님 풍금 소리에 맞춰 ‘등대지기’나 ‘겨울나무’를 부르는 게 고작이었는데, 읍면리 단위 사는 가난뱅이 촌보이에게도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와 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온 거다. 단돈 500원에!


처음 갔을 때 노래방 요금은 곡당 500원이었다. 당시 농심 신라면 두 개 반의 가격으로, 지금 실물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500원 안팎이다. 이전에 상상도 못 했던 환상의 세계로 가는 입장권 가격으로는 저렴했지만, 선뜻 용기를 내기는 어려웠다. 한 곡만 부르고 나오지는 않았으니까.


이듬해였던 1993년부터 노래방들은 시간제 요금을 받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긴 노래를 부르는 녀석들은 우정의 손찌검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대개 각자 돌아가며 새로운 노래에 도전해 보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씩 부르며, 곡 배분의 평등으로 노래방의 평화를 수호했다. 어쩌다가 매혹적인 이성이 함께하면, 숨겨뒀던 필살곡에 영혼을 한 줌씩 연소시키며 시간을 더 쓰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심장에서 응원의 똘레랑스가 움텄다. 기나긴 락발라드 부르는 친구가 있어도, 누구 하나 탬버린이나 선곡목록도서로 가격하지 않았다.


“연애해라 너라도, 박수칠게 우리는!”


그래도 노래방의 엔딩은 항상 같았다. 종료 시간이 2~3분쯤 남을 무렵이면, 누군가는 책자를 뒤적여 마지막 노래를 예약했다. 그 피날레송은 한 사람씩 한 파트씩 돌아가며 부르는 긴 노래였다. 종반부엔 감동적 합창으로 함께 얼싸안곤 했다. 쌀 한 말어치도 안 되는 친분을 영원한 우정으로 윤색했다. 취기가 광대뼈까지 얼큰하게 오른 밤엔, 울컥한 맘에 눈에서 찔끔 액체를 착즙했던 적도 있다.


015B의 ‘이젠 안녕’이었다. 청소년기 초보 사내녀석들에겐, 사랑타령이 유치해 보이기 마련이다. 명문대 다니는 똑똑한 형들이 존재와 꿈과 사회에 대해 들려주는 고민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마치 나도 그들의 우리인 듯, 덩달아 우쭐해지곤 했다. 그런 이들의 곡을 좋은 이들과 함께 길고 진하게 부르고 나와, 막차가 끊기기 전 귀가의 ‘이젠 안녕’을 고했다.


며칠 전, 노래방 인생 32년 중 처음으로 첫 곡을 ‘이젠 안녕’으로 고르는 후배를 보았다. 뭔가 어색하지만, 90년대로 돌아가 한 파트씩 추억을 불렀다. 이 친구가 서둘러 집에 가나 상상했는데, 꾸역꾸역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렀다.


이튿날 궁금해졌다. 오프닝곡으로 피날레곡을 부르니 묘한 매력도 있었다. 도대체 이런 파격적 선곡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헛개수 한잔하자며 지난밤 전우들을 불러내 엘리베이터를 탔다.


“양갱, 처음부터 이젠 안녕을 부른 특별한 이유가 뭐야?”


후배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되묻는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술 많이 드셨죠?”


아, 졸지에 알콜츠하이머 질환자가 됐다. 역적누명 덮어쓴 듯 억울했다. 노래방에서 가창력이 가장 뛰어났던 다른 후배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무심코 듣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다. 이게 죄다 후배 때문이다. 양갱, 이젠 안녕이다!


그나저나 다른 세대에게도, X세대의 ‘이젠 안녕’ 같은 공식 피날레 노래가 있을까?

https://youtu.be/kHh2SVOFnGw?si=iV9yaByn2abbQx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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