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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bo, 팽팽 돌아 강렬했던]

by 어풀

1. “키트, 터보 추진!” (외화 전격Z작전)

- 마이클, 전 비행기가 아니에요!


2. “태풍에도 꺼지지 않는 강력한 불꽃~” (터보라이터)

- 겨울에 득템했다면, 태풍이 채 오기 전에 고장 및 분실~


3. “너를 나만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꿈이 생긴 거야~” (댄스그룹 터보)

- 종국이형은 사실 댄스동아리 출신이었다!


Turbo란 말에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

내겐 터보라이터의 푸른 불꽃이 가장 먼저 피어오릅니다.


고교생 시절 음반점에 자주 갔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들렀던 것 같군요.

십대 후반의 늙은 소년들은, 자신들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몸만 자란 어린이 시절엔, 퀸의 ‘Don’t stop me now’와 반 헤일런의 ‘Right now’같이 밝고 경쾌한 락 음악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른의 덩치에 익숙해지면서부터는, 엔니오 모리꼬네 옹의 ‘씨네마 천국’과 ‘씨티 오브 조이’처럼 따스한 울림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음반 가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이 2천원 아래였던 시절, 개당 4천원이 넘던 카세트 테이프를 살 땐, 설렘과 망설임이 함께했습니다.

가끔은 이색적인 앨범재킷 디자인만 보고 모험을 시도했지만, 음반점 사장님의 설명과 추천을 듣는 게 가장 슬기로운 음악생활이었습니다.


사장님은 단아했습니다.

악세사리와 장식품도 팔던 네 평 남짓한 음반점은, 목각인형처럼 고운 사장님 모습에 우아하게 느껴졌습니다.

열아홉 소년에게 스물넷 숙녀는 지혜롭고 세련돼 보였습니다.

부드러운 듯 싱그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야니와 반젤리스의 뉴웨이브와 곡들을 설명해 줄 땐, 살짝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일 없이 가게에 들르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작은 가게 안에서 함께 떡볶이와 순대를 먹던 시간도, 수능 잘 보라며 삼계탕을 사줬던 복날도 기억합니다.

음악 이야기는 어느덧 미래와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그거 아니? 대두는 꿈 이야기할 때 참 신나 보여.”


“정말요? 처음 들어보는 얘긴데요.”


사장님은 누나가 되었습니다.

가을소풍으로 대전엑스포에 갔던 날엔, 누나에게 줄 작은 장난감을 샀습니다.

빨리 건네주고 싶은 마음에, 돌아오는 버스가 더디게만 느껴지기도 했었죠.


스물에 접어들었던 해 2월 오후, 누나의 음반점을 찾았습니다.


“누나, 저 내일 졸업해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와, 이제 진짜 어른이네. 축하해.”


“잘 지내요. 저 한동안 안 내려올 것 같아요.”


“그래, 대학공부는 많이 다를 거야. 건강 잘 챙기고. 술은 꼭 필요할 때만 마시는 거다. 담배는 절대 피우지 말고.”


쭈삣대며 말을 잇습니다.


“어… 얼마 전에 배웠는데요.”


“왜 그랬어? 담배는 안 피우기로 약속했잖아! 누나 속상한 건 생각 안 해?”


한동안 무안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토라졌던 누나가 진열장에서 무언가 꺼냅니다.


“잘 간직해. 남자들은 술 마실 때 잘 잃어버린다더라.”


라이터였습니다.

가게에서 가장 멋스러워 자주 눈길을 끌던 녀석입니다.

붉은색 메탈 바탕에 앞면엔 까만색 장식 문양이 부착돼 있었습니다.

1994년 몸값이 무려 5만원에 가까워서, 치킨을 바라보는 소의 심경으로 대했던 터보라이터가 내 손에 건네졌습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뗍니다.


“누나, 이거 너무 어른스러워요.”


“괜찮아, 받아. 누나 생각하라고 주는 거야.”


“너무 비싸서요.^^;;”


누나도 뭔가 생각하더니, 다른 걸 꺼냅니다.

암회색 금속 재질 터보라이터입니다.


“이건 괜찮지?”


“와, 이거 딱이다. 세련되고 감촉도 좋아요.”


“저녁에 뭐해? 약속 없으면 축하주 사줄게.”


음반점을 나오니 눈발이 흩날립니다.

오락실에 갈까, 커피숖에 갈까 고민하다가, 미용실로 향했습니다.


“어떤 스타일로 깎아드릴까요?


“음, 고백하기 좋은 스타일이요.”


“저 남자친구 있는데요.”


“저도요.”


“아, 애인 있으시구나.”


“아뇨, 남자친구요. 몇 녀석 있어요.”


“에휴… 든든시겠어요.”


머리가 마음에 듭니다.

시원스런 마음으로 미용실을 나섭니다.

해 저문 겨울 저녁엔 따스한 애수가 스며있습니다.

함께 손 잡고 온기를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큰일 나. 천천히 마셔.”


500cc 생맥주를 원샷하는 모습에 누나가 놀랍니다.


“세 잔까지 연달아 털어봤어요.”


“술 많이 마시는 거 자랑 아니야.”


“네…”


시무룩해진 마음을 눈치챘는지, 누나가 빙긋 웃습니다.


“꿈 얘기 들려줘. 얘기 했었지? 대두는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나 보인다고.”


“이뤄질까요? 사실 자신 없어요.”


“아니. 빛나 보여. 남자는 외모나 물질이 다가 아냐.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건 자신감이야. 누나한텐 그래.”


설레는 칭찬과 살짝 돈 취기는, 용기를 줍니다.

liquid courage, 객기라고도 부릅니다.


“언젠가는 누나한테 특별한 말 할지도 몰라요. 내 목소리가 좀더 낮고 깊어지면, 그 순간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살짝 당황한 누나의 눈길이 내 얼굴에 닿습니다.

입을 가리고 빙긋 웃곤 입을 뗍니다.


“그때도 원샷하면 안 들어줄 거야.”


누나의 섬세한 손이 내 손에 이어집니다.

따스합니다.

손 잡기 좋은 밤이 그렇게 깊어갑니다.


라이터는 입학식을 하루 남기고 요단강 유람선을 타버렸습니다.

신기하고 자랑하고 싶어, 아무때나 너무 자주 켰던 탓이었나 봅니다.

아주 매혹적인 불꽃은, 아주 오래가지는 못하나 봅니다.

터보의 속도로 망가져서 터보라이터인 걸까요?^^*


turbo는 ‘turbine~의’란 뜻으로, 라틴어 turbo는 팽이를 가리킵니다.

turbine은 팽이, 소용돌이, 물레방아를 의미합니다.


turbocharger의 줄임말로도 쓰입니다.

터보차저는 엔진 흡입공기의 양을 늘려 출력을 크게 높여주는 장치입니다.

공기를 공급해주는 supercharger와 이를 구동하는 turbine이 조합돼, ‘터보’라고도 부릅니다.


터보라이터 부품 중에, 터바인이 없습니다.

태풍이 몰아쳐도 꺼지지 않는 힘찬 불꽃을 일으켜, 터보차저가 부착된 듯 ‘강력한 라이터’란 의미로 붙은 이름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일반명사로 쓰이고 있는데, 해외에선 특정 브랜드라고 추측해 봅니다.


jet flame lighter나 torch lighter라고도 불립니다.

jet는 ‘뿜어내다’, ‘분출하다’는 뜻입니다.

‘불꽃 분사 라이터’쯤 되겠네요.

짐작하시듯, jet기도 엔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로 하늘을 날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횃불로 알고 있는 torch는 고대프랑스어 torche에서 왔습니다.

‘한 줌 지푸라기’와 ‘꼬인 것(twisted thing)’이란 뜻이 있습니다.

불이 잘 붙는 지푸라기를 꼬아 활활 타는 불꽃을 만들어 유래한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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