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에 동주란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밝은 성격에, 달리기를 잘했고, 학업성적은 조금 아쉬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키가 커서 제 바로 뒷자리에 앉았고, 얘기를 가끔 나누곤 했습니다.
아직 바람에 한기가 스며있던 이른 봄날의 일입니다.
급식우유 상자에서 마지막 남은 걸 들고 오는데, 동주짝꿍 소연이가 자기도 받지 못했다더군요.
그때 동주가 끼어들었습니다.
"남자가 이런 거 양보해야 남자지."
"어? 왜?"
"원래 그런 거야."
얼떨결에 우유를 내주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 얘기를 했습니다.
"네 우유를 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소연이란 아이가 우유를 받을지 생각해 봤어야지. 그리고 너 건강하게 자라라고 엄마 아빠가 고생해서 마련한 돈으로 먹는 우유야. 또 그렇게 소홀히 하면 실망할 거야."
"동주는 그렇게 해야 남자다운 거랬어요."
말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을,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어린이날이 지난 지 얼마 안 될 무렵,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저를 찾는다고 해서 가봤더니, 녹색 플라스틱 물컵을 들이밀며 말하더군요.
"이거 왜 이렇게 만들었어!"
담임은 30대 초반 여성이었는데, 치맛바람 학부모를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우리집 살림살이는 팍팍했고, 어머니는 그저 그런 둘째 아들 학교생활까지 신경 쓰시기엔 너무 고단하셨습니다.
담임에게 전 별볼일 없던 녀석일 뿐이었습니다.
컵 안 바닥에는 연필로 쓴 낙서자국이 심각했습니다.
직전 교시 미술시간에 컵에 연필로 짓이겨 휘돌리던 누군가가 떠올랐습니다.
"저 아닌데요. 이거 송석환이 그런 건데요."
"동주가 니가 그랬다던데!"
송석환네 어머니는 학교에 자주 찾아오던 분이었습니다.
"저 정말 아니래두요. 동주 불러올게요."
"어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말대꾸야!"
잠시 후 동주를 만나 물어봤습니다.
"왜 내가 컵에 낙서했다고 거짓말했냐?"
그러자 갑자기 녀석이 울먹이며 소리쳤습니다.
"난 우리형 때문에 맨날 이렇게 엄마한테 혼난다! 너만 억울한 줄 알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고, 담임은 제가 친구를 울렸다고 또 벌을 세웠습니다.
얼마 후 동주는 전학을 갔고, 다시는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명절연휴의 끝자락, 애니메이션 채널에서 '안녕, 자두야'를 보는데 급식우유 에피소드가 나왔습니다.
불현듯 지나치게 마음이 순수했던 동주와의 추억들도 되살아났네요.
동주를 다시 만난다면 한 마디 건네고 싶습니다.
"이 개x끼야. 어금니 꽉 물어!"
[사진설명] 글내용과 아무 관련 없는 두 청년이 머쓱하게 웃음짓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