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갈릭 Mar 02. 2019

소박한 단단함으로

요시모토 바나나, 바다의 뚜껑

돈가스 덮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다. 그 다섯음절을 눈으로 읽어내리는 순간, 침이 고였다.

그 시절 하나둘 들춰보던 일본 소설에는 어김없이 음식 이야기가 나왔다. 어김없이 파스타를 삶거나 맥주를 마시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 창문을 넘어와 돈까스덮밥을 건네던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의 주인공. 요시모토 바나나의 또다른 소설 <암리타>에도 등장인물들이 함께 뭔가를 먹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사소한 행위다. 하지만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단단한 행위다. 절망에 허덕이거나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슬픔에 젖더라도 우리는 먹는다. 밥 한 술에 오늘을 지나 내일로 나아간다. 먹는 것이 무너지는 순간, 많은 것들이 흔들린다.

오랜만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을 읽었다. 무언가를 먹는 일뿐 아니라 일과 후 산책, 동네 바다에서 하는 수영 같은 사소한 일상들이 주는 단단함을 곱씹어보게 하는 책이다. '그래, 요시모토 바나나 책은 이랬지' 하며 읽었다. 고단한 출퇴근 길 위에 널브러진 나를 다독여주는 책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작은 빙수가게를 하는 마리가 '엄친딸' 하지메와 보낸 어느 여름, 이것이 모든 스토리를 갈음할 수 있을 만큼 짧은 소설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짧다고 단순하진 않다.


쇠락해가는 바닷가의 마을, 느리고 묵묵하다는 이유로 떠났다가 같은 이유로 돌아온 마리. 충분히 슬퍼하며 할머니를 보낼 시간은커녕 사람과 돈 탓에 상처 받은 채로 할머니의 손에서 비취반지를 빼내야 했던 하지메. 두 사람은 함께 얼음을 갈고,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수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도시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찾아간다.


작고 평범한, 그래서 소박하다 말하는 것들의 단단함. 지쳤다고 생각했을 때 들이키는 단골카페의 커피 한 잔, 목욕 후 마시는 차가운 맥주 같은 것들로 다시금 힘을 내어볼 때, 또 하루를 넘기고 다음날로 향할 때 우리는 그 소박한 단단함으로 살아가 본다.


"세상이 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게 존재(54쪽)"하고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조그만 화단을 잘 가꾸어 꽃이 가득 피게 하는 정도(82쪽)"니까.




30쪽) 에어컨 없이 어둡고 좁은 장소에 갇혀 얼음을 계속 갈아 대는 일은 아주 소박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박함 너머에 있은 것을 줄곧 바라보았다.


100쪽) 얼음은 녹아 금방 없어지는 것이라, 나는 늘 아름다운 한때를 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의 꿈, 그것은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린아이도 나이 지긋한 어른도 다들 신기해하는, 이내 사라지는 비눗방울 같은 한때였다. 


그 느낌을 정말 좋아했다.


그러니 그것을 잡아 조금이라도 어디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얼음은 엷고도 달콤하게 사라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나는 그걸 좋아했다. 그저 단순히 좋아했다. 


102쪽) 해결이란 정말 재미있다. '이제 틀렸네.' 싶을 쯤에는 반드시 찾아온다. '반드시 어떻게든 될 거야.'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짜내다 보면 전혀 다른 곳에서 불쑥, 아주 어이없이 찾아오는 것인 듯하다.


113쪽) "만약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사라지는 거라면, 뭐 그건 그대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새로 떠밀려 온 것에 그 빈자리를 메우기 걸맞은 의미가 없다면, 나는 싫어."


117쪽) " 마리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너무 몰라. 사람인데, 마치 산 같아. ... 그래도 마리는 자기의 대단함을 그냥 모르고 지냈으면 좋겠어."

매거진의 이전글 미셸 오바마는 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