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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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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Jul 21. 2019

전복을 잘 손질할 때가 되면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엄마는 아이에게 종종 전복죽을 만들어줬다. 곱게 내장을 갈아 잘 불린 쌀과 섞으면 카키색을 띠는 그 음식은 본래 귀한 것이었다. 내 생애 첫 전복죽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먹어본 일이 없어서) 전복은 비쌌다.

기술의 발달은 식탁의 풍경도 바꾼다. 언젠가부터 마트에서 전복은 4~5마리를 만원에 살 수 있는 음식이 됐다. 오늘 아침, 생선코너 직원이 건넨 대로 들고온 전복도 제법 굵직한 놈들이 다섯 마리에 9900원이었다. 가격 장벽이 낮아지니 제일 먼저 우리집 지갑부터 열렸다. 오물오물대는 첫 손주가 신기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때마다 전복을 사왔다.

전날 저녁 갑자기 구토를 하던 아이는 오늘 아침에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또 다시 구토를 하고, 열도 좀 있는 채로 축쳐져 있었다. 그래서 눈가가 벌개졌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아이가 나를 불렀다.

"엄마, 전복죽 먹고 싶어요."

복직 후의 일상은 충분히 빡셌다. 나그 이유만으로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하루의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마트에서 카트를 채우는 것은 대부분 맥주(혹은 다른 술과 안주...)였다. 오늘은 달랐다. 몇 개월 사이에 볕을 받아내고, 들을 품어내고, 비를 머금은 작물들이 온갖 색을 자랑하고 었다. 그 신선함을 몸에 간직한 일상은 조금 다르리란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카트가 찼다. 물론 전복도 챙겼다.

생전복을 손질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다. 오랜만에 싱크대 앞에 섰어도 난감함이 덜했다. 문제는, 절차의 복잡함이 아니라 기술의 미숙함이었다. 전복과 껍질이 맞붙은 곳에 최대한 숟가락을 깊숙이 찔러넣어 비틀어 돌려내야 살과 내장이 온전하게 떨어져나온다. 마지막으로 전복을 손질했을 때에도 이부분이 난제였다. 오늘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그렇게 숟가락과 사투를 벌이고 난 뒤, 자개처럼 무지개빛을 띄는 전복의 밑바닥이 드러났다. 부분부분 전복 살점이 떨어지지 않았고, 내장도 살짝 터져 지저분한 그 껍데기를 본 나는 갑자기 칫솔로 박박 닦아대기 시작했다.

어쩐지 우리 엄마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능숙하게 전복을 손질할 때쯤이면, 아이가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전복죽을 먹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아무 것도 아닌 생각에 젖어 또 청승을 떨었다. 이런 날엔 시간이 좀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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