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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Jul 03. 2019

홀로 걸었던 뮌스터

2018년 6월 25-26일

스카이라인이 높지 않은 도시들은 삶이 조금은 느려도 좋다고 권하는 곳이다. 그러니 자전거로 이동해도, 걸으면서 다녀도 시간은 인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난만한 스카이라인은 사람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

그 책을 읽을 때만 해도, 1년 뒤 내가 그 도시를 걷게 될 줄 몰랐다. 너 없이, 정확히는 애들 없이 걷게 될 줄도 몰랐다. 이 모든 일들이 현실이 된 순간, 나는 하염없이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이 설레 어쩔 줄 몰랐다.

베를린에 취한 2박 3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방법무부 인터뷰를 마친 뒤 나온 거리는 더위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 지독한 열기를 뚫고 우리는 5시간 넘게 달려 뮌스터에 도착했다. 교외 쪽에 위치한 숙소 주변은 이미 대부분 불이 꺼진 상태라 새로운 도시에 왔다는 흥분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다음날, 멀리서 뮌스터 주교청과 대학들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나서야 전날 아우토반 위에서 느꼈던 흥분이 살아났다.

1년 전 여름, 동네 도서관에서 허수경 시인의 <너 없이 걸었다>를 읽었다. 시인을 잘 모르고, 뮌스터란 도시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같은 시리즈물을 재밌게 읽어 고른 책이었다. 하지만 이전 책과 달리 한없이 쓸쓸하고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들로 가득했다. 알 수 없는 어느 도시도 어쩐지 바짝 마른 이미지로 남았다.

내 고향의 풍경인데도 독일의 한 도시에 있는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그 풍경은 기묘한 향수와 이국적인 경이감으로 나를 이끌었다. 만일 내가 한국에서 이런 칠기들을 본다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소의 이동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변화 앞에서 나는 기묘한 환상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외국어를 쓰고 사는 동안 나는 우리말로 대화할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컷 우리말로 수다를 해보았으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에게 절실한 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눌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특정한 사람들이었다. 그 특정한 사람들이 들어 있는 기억의 서랍은 하도 자주 열어보아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다.

- 같은 책에서


고향이 될 수 없는 도시에서, 모국어가 될 수 없는 말을 쓰고 살아가는 그의 기억의 서랍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질문을 던질 수도 없는 존재가 됐고 나는 뮌스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짧게나마 마주친 도시는 상상과 달리 표정이 풍부했다. 대성당 마당을 가득 메운 노점과 관광객들로 채워진 거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반도네온 소리는 오히려 이 도시의 생기를 보여줬다. 메모를 뒤적여보니 시인도 비슷한 말을 했더라. 그가 살아온, 살아낸 도시는 마른 장작이 아니었다. 건초더미가 아니었다.

뮌스터의 중심가에 머물고 있는 시대의 표정이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어느 도시든 한 시대만이 불멸의 기념물처럼 남지는 않는다. 도시에 남아 있는 과거의 표정에는 크루아상처럼 여러 지층이 있다. 중세가 있는가 하면 바로크의 명랑한 표정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세기말의 표정이 어른거리는가 하면 2차대전의 흔적이 도시의 모든 표정들을 관통하기도 한다. 새롭게 올 것들에게 호락호락 자리를 내어주었던 시대는 없었다. 새로운 것들은 오래된 것들의 무릎에서 오랫동안 유아기를 거친다. 유아기를 오래 지속한 시대는 오래 살아남는다. 인간이나 유인원들이 자연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을 동물학자들은 그들의 긴 유아기에 둔다. 어쩌면 한 도시는 유아기를 기억하면서 도시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시대들이 공존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 같은 책에서

다양한 표정을 가진 이 도시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낯선 거리를 홀로 걸었던 언젠가의 그처럼 그리워졌다. 혼라는 시간이 주는 달콤함에 흠 젖어있었지만 나는 이제 온전히 혼자가 아니다. 그리워하고 그리워해주는 이들의 얼굴, 밀가루 반죽 같은 막내의 오동통한 팔과 웃을 때마다 쏙 들어가는 큰애의 보조개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러니 떠난 사랑들이여, 당신들이 남기고 간 물은 인공호수가 되어 언제나 변함없이 내 마음 속에 머물고 있음을 아시라. 어떤 사랑도, 비참하게 배반된 사랑마저도 사랑이었으므로 그 사랑의 마음이 물처럼 흐르던 동안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웠고 삶은 살 만했는가. 물은 흐르고 사랑은 그 밑에 고여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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