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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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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Oct 04. 2019

냉장고가 있는 방

10여년 전, 처음 남편의 자취방에 갔을 때 냉장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화장실 창문으로 볕이 새어들어오는 반지하여도, 평수는 제법 있는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 냉장고는 숙박업소에서나 볼 법한 40~50리터짜리 냉장고였다.


연애 시작 전 남편에게 바리바리 갓 담근 엄마표 김장김치 한 통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아이고 내가 잘못 했구나' 싶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자취경력이라면 뒤지지 않건만, 단 한 번도 냉장실과 냉동실이 문으로 구분되지 않는 냉장고를 써본 적 없는 나는 남편의 작은 냉장고가 낯설었다.

남편이 오랫동안 그 작은 냉장고를 쓸 때, 나는 지상의 방 한 칸에서 자취를 했다. 풀옵션이라 불리는 대학가의 원룸에는 작아도 냉장실과 냉동실이 제대로 나뉜 냉장고가 있었다(당연히 남편의 것보다 컸다). 하지만 그 냉장고가 쉼없이 윙윙대는 소리를 피할 공간이 내겐 없었다.


남편은 볕을 포기한 대신 작은 냉장고 소리를 분리할 수 있는 방을 얻었고, 나는 볕을 얻은 대신 약간 더 큰 냉장고 소리에 시달리는 공간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반짝거렸을 그때, 정작 우리는 그런 사소하지만 컸던 일들 탓에 남루했다. 시절은 봄이 아니라 늦가을 같았다.


결혼을 준비하며 여느 신혼부부처럼 냉장고 고민을 시작했다. 운좋게 볕도, 공간도 포기하지 않게 된 우리는 크고 번쩍거리는 신형 냉장고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때는 몰랐다. 위풍당당한 800몇리터짜리 냉장고를, 그리고 그 냉장고가 쉼없이 윙윙대는 소리를 무제한 듣지 않아도 되는 보금자리를 얻은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게다가 그냥 냉장고에 600리터가 넘는 김치냉장고까지 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기밥솥조차 땔 날이 없어 냉장고는 늘상 텅 비어 있지만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너댓칸으로 층층이 나뉜 냉장실과 냉동실을 갖추고, 거기에 모자라 오래 묵은 김치조차 살뜰하게 보관해주는 김치냉장고까지 갖춘 것을. 그리고 가끔 기분이 내키면 두 개의 냉장고를 채울 수 있는 형편인 것을.

오래토록 잊고 지낸 오랜 현실을 부희령 소설가의 <냉장고가 있는 방>을 읽다가 깨달았다.

몇 년 간격으로 집을 옮기는 동안 그는 자신의 주거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넓이가 애매한 집을 산 것도 그런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막상 자기 소유인 집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밤마다 자신의 가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냉장고 때문이었다. 낡은 냉장고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은근히 시끄러웠다. 신경을 긁었다. 바닥까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때론 몇 가지를 얻고, 때론 몇 가지를 포기한 덕에 우리의 주거 공간은 예전보다 넓어졌다. 불안과 걱정이야 일상이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나의 가난을 생각하지 않는다. 개발의 깃발이 꽂힌 고향엔 삽질의 유령이 곳곳에 떠돌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아침 볕이 환하게 내리꽂히는 들판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더 많은 볕과 더 큰 냉장고, 더 넓은 공간을 얻어오는 사이에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려건만, 참 쉽지 않다. 자신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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