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느 하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갈릭 Oct 02. 2021

다정하게, 함께.

ⓒ Evelyn_Chai

얼마 전 아이가 "엄마, 나 한글공부 하고 싶어"라고 했다. 당혹 반, 기대 반에 "알겠다"고 한 뒤 지인에게 추천받았던 한글교재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물었다. 


"1호야 너 정말 한글공부 하고 싶어?" "응."


늘 그렇듯,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그러면 혹시 너 수학 공부도 하고 싶어?" '수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아이에게 짧게 설명했다. 아이는 또 대답했다. "아니. 한글공부 하고 싶어." 그렇게 우리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매일 엄마와 ○○○으로 한글공부를 하기로.


첫 번째 문턱은 예상대로 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어떤 날은 야근을 했고, 어떤 날은 늦었다. 햇수로 4년째 경기와 서울을 오가며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불의의 사고(뱀발 : 내가 다친 것은 아님)'까지 목도하며 밤 9시 넘어 귀가했다. 졸린 눈을 비비는 아이를 굳이 붙잡고 교육영상을 보여주고, 펜을 쥐여 종이에 써내려가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1호야, 한글공부 우리 어떻게 할까? 매일 하고 싶어?" 아이는 또 대답했다. "엄마 그러면 화요일이랑 목요일이랑 유치원 안 가는 날 할래." O.K 접수. 하여 토요일인 오늘, 두 번째로 동영상을 보여준 다음 교재를 폈다. 동영상을 본 순서대로라면, 우리가 함께 넘어야할 종이의 바다는 넒고도 드넓었다.


"엄마... 이렇게나 많아?????????"


영상은 짧지만, 단어는 많은 탓에 아이는 곧바로 풀이 죽었다. "아니야, 다 안해도 돼. 근데 **까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본 △△도 저만큼 뒤에 있잖아."


일단 연필을 잡은 아이는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힘들어..."라고 했다. 나는 "그러면 우리 ##까지만 하자"고 정리했다. 몇 시간 뒤, 지글지글 익어가는 돼지갈비를 뒤척이는데, 아이가 갑자기 "으아, 한글공부 그거 쓰는 거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했다. 나는 한 번 더 "1호야 그거 다 안 해도 괜찮아. 매일 조금만 하면 돼"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 Jose Antonio Alba

그럼에도, 아마 아이에게는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다. 세상에서 처음 아이와 만난 다음, 몇 년 간의 난관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하나씩 알려주고, 조금씩 자신의 의지가 생겨가는 아이와 호흡을 맞추는 일이었다. 


유치원 단계에 돌입하면서 아이는 달라졌다. 2년차 하고도 중반을 넘어선 현재는 또 다르다. 취학을 코앞에 두는 내년이면 더 변할 테고, 초등학교의 삶은 당장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그 단계, 단계마다 우리는 얼마나 다정하게 지나갈 수 있을까. 바라는 것은 단 하나인데, 정확히 '무엇을 바라느냐'가 나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결국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니, 지금의 막연한 욕망은 조만간 100개 혹은 그 이상으로 자잘하게 나뉘어져 우리를 부추길 수도 있다. 솔직히 자신은 없다.


다만 잊지 않겠다고 되새기고 되새길 뿐이다. 아이가 원하는 일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아이에게 버거운 상황일 때 내 역할은 다그치거나 압박하는 게 아니다. 아이가 낼 수 있는 만큼의 속도로, 아이가 가야하는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조금 더 다정하게 함께 걷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야 하는 것이어도, 평범한 것이어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