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는 쉬어가는 게 좋지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사유를 보호하는 가면이었고
그 가면 덕분에 말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동체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되었다.
모세도 비슷한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은 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을 것이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늘 같은 의심을 품는다.
혹시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신의 권위에 기대어 공포한 건 아닐까?
이는 신앙을 공격하는 질문이 아니라, 말과 권위의 구조를 묻는 질문이다.
말은 언제나 자기보다 큰 입을 빌려야 법이 되고, 규범이 되고, 금기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의 이름을 빌려 말하는 순간, 우리는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된다.
하나는 믿음, 다른 하나는 광신이다.
놀랍게도 출발점은 같다.
불안, 설명되지 않는 세계,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차이는 그다음이다.
어떤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자기 생각을 말한다.
그는 신을 설명하고, 정리하고, 단정한다.
그 말은 또렷하고, 명확하고, 빠르다.
이때 신은 확성기가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투사다.
투사는 편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크게 말하면 되니까.
그러나 어떤 순간, 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때가 온다.
기도는 공중에 흩어지고, 질문은 되돌아오지 않으며, 설명은 모두 공허해진다.
그때 남는 것은 답이 아니라 중단이다.
이때 사람은 말할 수 없게 된다.
대신 선택해야 한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책임질 것인가.
이 순간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른다.
신이 말을 걸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말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은 그다음에야 등장한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다.
믿음은 “옳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겠다”는 태도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조용해진다.
타인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신의 이름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는 설교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만 말한다.
반대로, 계시를 견디지 못한 사람은 다시 말을 붙잡는다.
이번에는 더 단단하게, 더 명확하게.
“신의 뜻은 분명하다.”
“의심은 불순이다.”
“나는 전달자일 뿐이다.”
이때 책임은 사라지고, 확신만 남는다.
이것이 광신이다.
광신은 믿음의 과잉이 아니라, 계시의 실패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 다시 말을 독점한 결과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기준을 믿는다.
신의 이름으로 말할수록 사람이 커진다면, 그건 광신이다.
신 앞에서 말이 줄어들고 책임이 늘어난다면, 그게 믿음이다.
어쩌면 신은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말을 멈추게 되는 자리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 앞에서 침묵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믿는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