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과 모세
성경은 바벨탑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 문장은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세계가 일정한 질서 속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언어가 하나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언어가 너무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말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였던 말을 붙잡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흩어지지 않기 위해, 잊히지 않기 위해, 이름을 남기기 위해. “흩어지지 말자”는 말은 야망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이동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떠나는 대신 머무르고 싶었고, 질문하는 대신 합의하고 싶었던 마음입니다.
바벨에서 말은 더 이상 관계를 여는 통로가 아니라, 세계를 붙잡아 두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쓰는 세계에서는 오해가 줄어들지만, 동시에 다른 방향을 상상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언어가 매끄러울수록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말은 설명이 아니라 경계가 되고, 의미는 이동하지 못한 채 고정됩니다.
그래서 바벨의 언어는 단단해 보였지만, 숨 쉴 틈은 없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흩어짐’은 처벌이라기보다 개입에 가깝습니다. 언어를 없앤 것이 아니라, 언어가 세계를 완결하지 못하도록 흔들어 놓은 사건입니다. 말이 하나의 의미로 굳어질 때, 세계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벨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은 언어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말은 나뉘고, 의미는 어긋나며, 이해는 늘 불완전해집니다. 이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말 위에 설 수 없고, 말 앞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말은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며, 대신 방향을 묻는 기준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말 앞에 선 사람입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설명이나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요청의 형태로 다가옵니다. 이 말은 붙잡아 둘 수 없고, 대신 짊어져야 하는 말입니다. 말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의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바벨의 언어가 머무름을 정당화했다면, 모세에게 주어진 언어는 떠나게 합니다. 하나는 세계를 붙잡으려 했고, 다른 하나는 광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말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말 앞에 선 인간의 위치입니다. 말을 사용하는 자리에서, 말에 응답하는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물론 이 말 역시 위험을 품고 있습니다. 주어진 말은 규칙이 되고, 규칙은 쉽게 절대가 됩니다. 말이 살아 있을 때는 길이 되지만, 말이 굳어질 때는 감시가 됩니다. 상징계는 언제나 이 두 가능성 사이에서 작동합니다. 없으면 무너지고, 강해지면 숨이 막힙니다.
우리 역시 이 두 자리 사이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말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을 때, 하나의 기준으로 세계를 단순화하고 싶을 때, 바벨의 언어가 작동합니다. 반대로 말이 나를 넘어서는 순간,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기준 앞에 설 때, 우리는 모세의 자리에 가까워집니다. 말은 여전히 무겁지만, 그 말이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 삶을 조금 느슨하게 만듭니다.
상징계는 이렇게 열립니다. 이미 하나였던 말이 세계를 닫으려 할 때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을 통해 인간은 다시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말은 필요하지만 완결될 수 없고, 질서는 중요하지만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긴장 속에서 인간은 말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갑니다.
목적은 알았지만
방향은 몰랐다
그래도
그는
떠났다
머무르지 말라는 부름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그 응답이
그의 이름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익숙한 이름들이
등 뒤에서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고향이라는 말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
혈통과 기억을 붙들던
오래된 호명들
그 말들이
더 이상 발을 묶지 못했을 때
그는
앞을 본 것이 아니라
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