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친해진 이들은 알고보니 모두 대학원생들이었다. 학부 교환학생 중엔 나처럼 정규 학기에 딱 맞춰 들어온 이들이 많지 않다 보니 히브리대학 쪽에서 학부생인 나를 대학원생 오티에 섞어버린 모양이었다. 오티에서 알게 된 이들 거의 대부분이 대학원생이었다. 엘리와 그의 룸메 세프, 최근에 친해진 반, 우리 중 유일한 남자인 윌리엄이 모여 '단짝 그룹'이 됐다.
우리들은 엘리의 방에 모여 차를 마시거나 학교 앞 커피숍 '아로마'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는 등의 소소한 만남을 가졌다. 서로가 듣는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새로 알게 된 음식 메뉴 같은 걸 공유했다.모두들 왁자지껄하게 노는 스타일은 아니었고차와 수다를 즐기는 쪽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날 오티를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사람들이 수도인 텔아비브로 여행을 같이 가자고 권해 우리 그룹이 거기에 끼게 됐다. 파티와 술을 즐기는 그들이 조용조용한 우리와 딱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스라엘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는 우리들끼리 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텔아비브로 가는 길은 멀었고 예상했던 대로 그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진지한 대화보단 수작을 걸거나 장난을 치는 일이 잦았고 불편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함께 있는 것이 슬슬 지겨워질 무렵 함께 길을 걷던 독일인 다비가 "너희 나라는 일본과 관계가 어때?"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독일인으로서 2차 대전이나 아우슈비츠 같은 것을 배우는 게 힘들었고 전범국가로서 부끄러웠다며 피해국가인 한국은 일본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한일 관계라는 주제 자체는 상당히 민감한 영역이어서 조심스러웠으나 처음 만난 두 사람의 공통 주제로 꺼낸 것치고는 사려깊다고 생각했다. 다비는 자기가 배우는 전공이 '과도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분쟁 종식 후 새로운 체제가 들어설 때 전쟁 범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이고 거기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 역시 미군정 통치로 일제 시대 때 바로잡았어야 할 것들을 바로잡지 못했다고 설명하며 그 학문이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맞장구 쳤다. 친구들은 무슨 그런 학구적 대화를 하느냐고 놀렸지만 우리는 신나게 대화했다.
이런 거리를 거닐며 이야기했다
다비와의 대화는 꾸준히 이어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나자 그는 또 다시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고 그때는 무슨 음악을 좋아하느냐, 영어를 어디서 배웠느냐 등등 사적인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밤이 무르익어 다같이 텔아비브의 클럽을 경험해 보자며 나섰을 때도 그는 '나중에 같이 한국음식을 먹어보는 시간을 갖자'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는 연애에 능숙하지 못하고 착각을 자주 한다. 조그마한 관심에도 '혹시?'하고 기대한다. 그런 스스로를 잘 알아서 한편으론 '아닐거야, 내가 착각하는 것 뿐이야'라고 되뇌기도 하였다. 다비를 만날 때도 그러했다. 아닐거야, 그냥 친절한 사람일거야.
그러다가 다비에게 홀랑 빠져버리게 된 어떤 순간이 찾아왔다. 다비는 클럽에 도착해 잠시 춤을 추다가 나를 따로 데리고 나와 술 한 잔을 하자며 데낄라 두 잔을 샀다. 우리는 바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비가 네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했다. 한평생 한국에서 나고자란 나는 그만 당황하여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오빠가 한 명 있으며...'를 읊고 말았다. 그가 웃으면서 자기에게도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라면서, 옛날에는 걔가 마냥 어리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라고 말하고 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 말 듣고 오해하진 말고, 지금은 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를 봐도 여자로 보여."라고 말했다.
그때 친구들이 다가와 놀자고 우리를 끌어냈고, 우리는 다시 무리 속에 섞였다. 그때 다비가 내 손을 잡고 가까이 이끌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손을 곧 놓아야 했지만 나는 이미 다비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새벽 3시쯤 되어 잠이 쏟아지자 반과 함께 밖으로 나와 햄버거와 콜라를 마셨다. 반은 다비가 네게 관심 있는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신나서 그래 보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그를 대할지 작전회의 비슷한 것을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층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반이 말했다.
"걔 근데 여자친구 곧 이스라엘 온다 했던 것 같은데."
누가?다비가? 나는 용수철처럼 일어났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페이스북 봐봐."
거기엔 하트 옆에 왠 여자 이름이 붙어있었다. 눌러보니 오래도 사귄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야?
반은 "네가 아는 줄 알았다"며 미안해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배신감이 들었다.
다음날은 내가 선약이 있어 먼저 나와야 했다. 한참 전에 잡은 선약이라 가는 게 맞았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친구들은 바다 수영을 하고 돌아왔고 저녁때 쯤 다비에게서 개인 메시지가 왔다.
"먼저 갔더라. 잘 들어갔어?"
"미안, 선약이 있어서 먼저 나왔어. 재미있었어?"
그의 메시지가 반가웠다. 나를 생각해주는 게 고마웠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지만 당장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의 메시지를 계속 기다렸다.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물어보기만 하고 답하지는 않은 채 대화를 마쳤다.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그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며칠 뒤 단짝그룹 중 하나인 윌리엄에게 나의 번뇌를 살짝 털어놨을 때 그는 단호했다. "같은 남자로서, 걔는 너한테 관심없어. 모든 여자한테 그러거든. 그냥 포기해." 그때는 윌리엄이 너무너무 얄미워서 한대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룹에 새로운 얼굴 크리스틴이 왔을 때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