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예루살렘 시내 한인 교회에 가던 날이었다. 트램이 다니지 않는 안식일이라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진도 찍고 행인과 인사도 나누면서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갑자기 맞은편 횡단보도 앞 도로에 구급차와 경찰차 여러 대가 급정거하더니 탕, 탕, 탕 소리가 시간 차를 두고 울렸다.
처음에는 대낮에 폭죽을 쏘는 건가 생각했지만 곧이어 골목 한쪽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것이 총 소리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쓰러진 남자 주위로 대여섯명 가량이 모여 있었고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더 발을 떼지 못했다.
조용하던 거리가 갑자기 웅성이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맞은편 아파트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쓰러진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거리로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창문 너머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발을 돌려 기숙사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추가 사격이 있을 수도 있고 더 갔다간 위험해질 것 같았다. 되돌아가는 동안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책상에 앉아 일기를 썼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었다. 공복에 뙤약볕의 길을 1시간 넘게 걷는 것도 힘들었지만 사방에 배치된 군인들과 쉴새없이 움직이는 경찰차, 구급차 사이를 걷는 것도 너무 무서웠다. 무방비 상태로 등을 총구의 과녁으로 내 주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를 혹시나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인으로 착각할까 봐 마주치는 사람마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갔다. 아무리 외국인은 직접적인 표적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사방에 있다는 건 결코 안전한 일이 아니다. 입 안이 완전히 마른 채로 걷고 또 걸어서 겨우 기숙사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사과주스를 두 컵째 마시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예루살렘포스트(현지 신문)를 찾아보니 다마스커스 게이트 근처 길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유대인 두 명을 찔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가해자는 사살되었고 유대인 두 명은 중상과 경상이다. 사건 직후에 상당수 팔레스타인인들이 그 자리에서 시위를 일으켰고 경찰들이 최루탄을 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제야 분쟁지역에 와 있다는 것이 피부로 실감 난다. 이제까지 본 예루살렘의 평화로운 모습이 총성 세 방으로 날아가버렸다. 이 곳은 평화로운 삶을 위장한 살얼음판이다. 폭탄 위에 크림을 발라 도넛인 척 하는 도시다.
돌아오는데 길가의 가정집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났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물소리를 듣자니 그 소리가 불과 5km 남짓 떨어진 저 공간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쪽에선 최루탄이 터지는데 한쪽에선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할 수 있다는 게, 그 사이에 엄청나게 큰 간격이 있는 것 같았다."(10월 10일 일기)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었다
이스라엘에 체류하는 동안 이런 테러는 하루에 한 번 꼴로 일어났다. 60살 노인이 버스를 타러 가다가, 4살 아이가 길을 걸어가다가 칼로 습격을 당해 병원에 실려갔다. 가해자는 주로 팔레스타인 소년들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가 낸 통계에 따르면 10월 한 달 간 매일 평균 2건의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주된 테러 공격은 버스나 관공서 등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대규모 살상이었다. 앞서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이 폭탄테러를 당한 시기도 2002년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조직을 이루어 동시다발적 시위(인티파다)를 주도하고 테러를 감행하는 등 세를 확장했다. 하지만 저항에 뚜렷한 결실이 없자 2010년대 들어 조직이 와해됐고 `외로운 늑대'라 불리는 개인이 살해하는 류의 테러로 바뀌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를 동력으로 삼는 게 아닌,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을 표출하는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왜 갈등할까. 쉽게 말하면 땅 때문이고, 어렵게 말하면 그걸 둘러싼 강대국의 분탕질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될 당시 문헌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주로 살던 이들은 아랍인이었고 러시아 등의 박해를 피해 찾아 온 유대인은 소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옮겨가자는 운동(시오니즘)을 본격화하면서 유대인 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영국이다. 1920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맡은 영국은 아랍인에게 아랍 국가 독립을 약속해 놓고도 뒤로는 유대인에게 이스라엘 국가 건립을 약속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 이주가 대폭 늘어난다. 로스차일드 가문 등 금융을 쥔 유대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미국도 이스라엘 건국에 협조했다.
1948년 유대인들이 텔아비브에 국기를 꽂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자 아랍 국가들은 이에 반발해 전쟁을 벌인다. 물론 미국의 최신 무기를 원조 받은 이스라엘을 이기진 못했다. 유대인들은 여러 번의 전쟁으로 요르단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골란 고원을 추가로 얻었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반면 팔레스타인 주민 70만명은 거주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오래 떠돌며 살던 유대인들이 마침내 국가를 찾은 반면 아랍인은 살 곳을 잃고 피난민이 된 것이다. 1920년부터 시작된 두 민족의 갈등은 이제 햇수로 100년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분쟁은 서로 다른 민족이 거주할 땅을 가지고 다툰다는 점에서 특징적이지만, 세계대전 이후 지배계층이 몰락한 틈을 타 열강이 개입하고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며 영토를 쪼개는 지경까지 간다는 점은 한국과 비슷하다.
한국도 1945년 일제 통치가 끝나고 누가, 어떤 이념의 정부를 세울지 미처 다 논의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들어왔고 설상가상 신탁통치를 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면서 국론이 분열했다. 미국과 소련의 신경전 속에 남한과 북한에 각 정부가 세워졌고 영토다툼의 연장선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땐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국가다. 세계대전이 어떤 국가에겐 지나간 과거인 반면, 어떤 국가에겐 생생한 현재인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걸어서 교회에 가는 일은 없었다. 한인교회 목사님이 매번 차를 끌고 데리러 와 주셨다. 짧은 체류를 마치고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에 아예 정착해 살아가는 이들로선 벗어날 수 없는 공포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