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예수의 유년시절이 깃든 나사렛에 갔다왔다. 기억 나는 것은 푹 젖은 운동화와 맥도날드 커피다. 아, 잘생긴 아랍 가이드도.
나사렛은 갈릴리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워낙 작은 시골인데 예수의 유년시절이 거기서 시작되어 그것으로 마을 전체가 아직까지 먹고 산다. 뚜벅이인 우리 두 사람은 이동의 제약이 컸으므로 갈릴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반드시 타야 했고 그날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가기 귀찮았다.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처음엔 이스라엘 성지가 궁금했지만, 몇 군데 둘러보니 많은 성지가 사실상 소원 비는 신당처럼 돼 버려 그리 기대되지 않았다. 나사렛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에 그냥 숙소에서 쉬고 싶었지만 어디든 가고파 하는 아빠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박물관 되게 잘 해 놨대. 버스도 바로 간대."
아빠는 여행 가면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 전형적인 한국형 여행자다.
예상했던 것보다 나사렛은 훨씬 더 좋았다. 동전함이나 손때 묻은 십자가를 갖다놓고 소원을 빌게 하거나 각종 싸구려 물건들을 파는 관광지 특유의 잡스러움을 걷어내고 `이스라엘 문화 재현'에 초점을 맞춰 구현해 놓은 곳이었다. 커다란 부지에다 예수가 자랄 당시 이스라엘 민속촌 풍경을 복원해 두었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안에 있는 스태프들까지 당시의 유목민 의상을 그대로 갖춰 입고 일을 하고 있었다. 올리브 열매를 짜는 기계와 목수의 작업실, 실 짜기 체험 공간, 유대인 회당 등이 성서 내용에 가깝게 복원돼 있었다.
이런 류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심. Nazareth Village youtube credit
가이드가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며 설명해 주었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둘러보았다. 한국에서 성서를 읽을 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풍습들이 구현돼 있어 새로 배운 것들이 많았다.
다 좋았는데 문제는 식사였다. 투어가 시작된 시간이 오후 1시였고 약 1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그 때 우리는 완전히 공복 상태였다. 사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식사를 할 시간이 없지는 않았는데 내가 아랍음식을 먹으려 하면 아빠가 안 내켜 하고, 아빠가 핫도그를 먹으려 하면 내가 안 내켜 하는 등 호사스러운 이유로 식당을 자꾸 건너뛰다 나중에 박물관에 거의 도착해서야 배가 본격적으로 고파졌다. 이미 식당가를 다 지나와 버린 뒤였다.
박물관 안에도 식당은 있었으나 거의 코스요리로 먹어야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고 우리는 30분 뒤에 투어에 참석해야 하는 처지였다. 배가 너무 고파 투어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레스토랑이라도 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자리에 일어났으나 `다음 투어는 오후 4시예요'라는 매표소 직원의 말에 도로 털썩 앉고 말았다. 여행의 귀중한 교훈, 입맛이 없어도 끼니 때 잘 먹어둬야 한다는 것을 그 때는 간과했던 것이다.
허기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상태로 투어에 참석했으나 막상 또 눈 앞에 있는 다양한 볼거리들을 보니 어찌저찌 배고픔이 잊혀졌다. 무엇보다 잘생긴 아랍 가이드가 너무나 설명을 잘 해서 신통방통했다. 아랍인인 그가 어찌 그리 기독교 전통을 잘 아는지 궁금해 혹시 종교가 어찌 되냐 물으니 그가 `크리스찬 아랍'이라고 대답했다. 유대인 가운데 예수를 믿는 `메시아닉 쥬'는 종종 봤어도 아랍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처음이었고 그 뒤로도 보지 못했다. 너무 신기하고 그의 배경이 궁금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는 도도한 표정으로 자리를 금방 떠나 버렸다.
투어에서 나온 뒤 그대로 팔라펠 샌드위치 가게로 직행해 맛나게 팔라펠 샌드위치를 먹었다. 중동 음식을 잘 못 드시는 아빠도 배가 많이 고프셨는지 이번엔 맛있게 드셨다. 콜라에 감자튀김까지 싹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주방장이 휙 나와선 자기는 꾸리야가 좋다며 아빠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옆에 있던 식당 주인이 덩달아 다가오면서 아빠는 별안간 거구의 아랍인의 어깨동무 사이에 끼어 사진을 찍게 됐다. 좋은 구경도 했겠다 샌드위치도 먹었겠다 우리는 마음이 풍족하여 그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헤어졌다.
그 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으므로 집에 갈 때 쯤 나의 신발은 푹 젖어 버렸다.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물 소리가 나는 것이 영 찝찝하고 추운 느낌이 들었다. 버스가 오려면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으므로 우리는 가까운 맥도날드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사 마시기로 했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라떼를 마셨다.
거기선 거의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발 춥다, 그치 아빠."
"웅 맞어."
이런 대화 정도 하고는 아빠는 간만에 와이파이가 된 김에 엄마와 카톡을, 나는 휴대폰을 하며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날의 완연한 행복은 귀가해서 발을 씻고 뽀송한 양말로 갈아신고 나서야 찾아왔다. 다 마른 발에 면의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지자 마음이 든든해졌고 피로감도 몰려왔다. 친절한 에어비앤비 주인 에이탄의 집에서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