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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Oct 25. 2021

가을단상

부모는 진심, 자식은 형식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의 능선이 아침 안개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청명한 날씨다. 능선은 긴 보폭으로 겅중겅중 늘어지고 있을 뿐 그리 바쁜 걸음은 아니었다. 동녘 햇살이 제법 정겹게 내려앉은 능선을 따라 천천히 눈길을 옮길 즈음, 왠지 낯설지 않은 형상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때마침 초점을 잃고 있던 내 정신이 퍼뜩 제자리로 돌아왔다. 선정적이다 싶을 정도로 봉긋 솟아오른 능선은 누군가가 아예 작정을 하고 빚어 놓은 탄력 넘치는 여인네 젖가슴이다. 순간 스스로가 ‘잡것’ 하며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눈길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으니, 이는 50년 너머 동안 세속을 헤집고 살아 온 관성의 법칙이다

아침 안개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산들의 능선

  이 좋은 가을날에 내 마음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탄력 넘치는 여인네의 그것이 아니라, 그 능선 너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숨어 있는 또 다른 여인의 가슴 형상이었다. 딸이 엄마가 되는 것처럼 같은 듯 하지만 또한 엄연하게 다른 것, 그것은 바로 애써 떠올려야 겨우 기억해낼 수 있는 어머니의 젖무덤 모양을 꼭 닮아 있었다. 앞의 못된 것이 부드럽게 달리다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면서 남정네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 흥분제라면, 어머니의 그것은 늘 자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인생의 신경안정제라 할 수 있으리라. 오늘 나는 이 청명한 가을날에 그 형상을 보았다, 어머니의 젖무덤 형상을. 그래서 이토록 가슴이 먹먹한가 보다.

  병상에서 하루 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두운 병실 복도에 늘어진 의자의 한 켠에 같이 앉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누구도 섣불리 꺼내지 못하는 말, 당신께서 앓고 있는 병이 암이라는, 그것도 말기 암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저쪽 복도 끝의 잔광이 거슬리는 듯 내 손을 잡고 따라오면서도 어머니는 자꾸 그쪽을 힐끗 보신다.
   
  “엄마, 내 말 잘 들어요.”
  
  순간 무슨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신 듯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움켜쥐신다. 속절없는 불안과 공포가 어머니의 떨리는 손아귀에 속속 모여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 고통은 손등의 실핏줄을 타고 잔인하게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일순 거칠어진 어머니의 숨결이 내 뺨을 훑는다.

  “암이래요......”

   .

   .

   .
     
  “알았다.”
  
  참으로 의연하신 듯하였지만 어머니의 떨림은 둔중한 아들의 직감으로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줄곧 어머니의 병상을 지켰으니 적어도 남들 눈에는 그런대로 쓸 만해 보이는 자식이었다. 어머니의 저린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고 아침저녁으로 휠체어를 밀고 다녔으며 자다가 일어나서 눈을 부비며 화장실에 모셔다 드리기를 여러 차례, 심지어 어머니의 대소변까지 기꺼이 받아냈으니 누가 봐도 전형적인 효자의 모습이었다. 병실의 환자와 가족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아이고, 효자다 효자!”
  
  그러나 이제야 깨닫는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병상의 침대에 누워계신 것이 아니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삶의 시한폭탄 위에 누워 계셨음을. 그 폐부를 찌르는 고통과 참담함이 어떠셨을까.


  어렸을 적,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가만히 있어도 천장이 돌아가고 땅바닥이 뒤집히는 공포감이 엄습해 오면 나는 어김없이 ‘엄마’를 찾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품에 안기면 악몽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망할 인종은 인생의 절벽에 홀로 서 계시는 어머니의 처절한 고통을 알려는 노력보다 주변의 평가와 시선에 더 신경을 썼으니 참으로 몹쓸 자식이 아니었던가. 암세포가 헤집어대는 통증보다, 얼마지 않아 터질 시한폭탄 위에 누워계시는 고통보다 지금 이 판국에 관중들 앞에서 깨춤 추고 있는 자식의 위선과 배신감이 차라리 더 서러웠을 터, 나는 정녕 효자가 아니라 효자를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내게  자주 입을 맞춰주셨다.

  돌아가시기 전 얼마 남지 않은 온전한 의식으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이제는 서럽게 내 가슴을 적신다.
   
  “니 아들은 점잖기도 하고 효심도 깊어 보인다. 잘 키워라.”
  
  혼수상태에 접어들었음에도 내가 나타날 때까지 끝내 삶의 끈을 놓지 않으시다가,  “엄마, 제가 왔습니다!” 는 내 음성을 듣고 알았다는 듯 잠시 기척을 보이고 이내 눈을 감으셨으니 그것이 벌써 십수년의 세월이 지났다. 어머니는 의연하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참으로 의연하게 떠나셨다.

  어머니 병실을 지킬 적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보고 한 말인 듯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건 진심이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건 형식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맞는 말이다. 고개 들어 또 다시 그쪽을 바라보니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분간은 아침이 되면 습관처럼 그곳을 바라볼 것 같다. 얼마 동안은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겠지만 그것마저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무덤덤해질 터, 그러고 보니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형식인가 보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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