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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Nov 05. 2021

낙락장송落落長松과 숙주나물

청령포(淸泠浦)에서 단종을 생각하다

  그날 세종대왕이 갓 피어난 연꽃을 무심하게 보고 있을 때, 동궁의 거처인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급히 달려온 늙은 상궁이 허리를 굽혀 고했다.


  “상감마마, 세자빈께옵서 방금 순산하시었습니다. 옥동자시옵니다.”


  이 말을 들은 세종대왕은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이해에 경사가 많구나. 김종서가 육진六鎭을 진정시키고 돌아온 데다 이제 원손元孫까지 태어났으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느냐.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면 오늘로 대사면을 내려 팔도 죄수들을 풀어주도록 하라.”


  그러나 그런 기쁨을 표시한지 얼마지 않아 대왕의 얼굴에는 곧 수심이 드리워졌다. 이윽고 그날 입직한 두 집현전 학사 중 한 살 위인 신하에게 먼저 말했다.


  “숙주叔舟야! 내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 내가 죽은 후라도 이 부탁을 잊지 말아다오.”


  이에 신하는 몸 둘 바를 모르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었다.


  “상감마마, 성상을 섬기고 남는 목숨이 있다면 백번을 고쳐 죽어도 원손께 견마지역犬馬之役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옵나이다.”


  왕은 다시 숙주보다 한 살 어린 옆의 신하에게 같은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엎드려 흐느낄 뿐이었다. 왕은 두 신하의 충성된 맹세를 확인했지만 얼굴에서는 슬픈 기색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는 1441년 음력 7월 23일 세종대왕의 맏손자이자 문종의 아들인 홍위弘暐가 탄생하는 날 경회루의 연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홍위는 그로부터 11년 후 어린 나이에 조선의 6대 임금으로 즉위한 단종이었다. 그날 임금과 동행했던 젊은 신하는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이었다. 왕이 자리를 뜬 후 둘은 살이 죽이 되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충성을 다하리라고 거듭 맹세했다. 다만 임금의 부탁에 숙주는 말로써 충성을 맹세한 반면 삼문은 부복俯伏한 채 그저 흐느낌만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걱정은 세자 향珦의 건강과 사직을 이어갈 후사 문제였다. 후일 문종으로 등극한 세자는 마음이 어질고 학문도 깊었지만 8형제 중 유독 허약하여 모두가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비인 세종대왕으로서는 병약한 자식에 대한 애처로움뿐만 아니라 서른이 다 되도록 후사가 없어 사직 보존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즈음에 원손인 홍위가 태어났으니 그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원손이 태어나자 기쁨은 잠시였고 다른 근심이 생겼다. 많은 아들 중 골칫덩어리인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안평대군은 주색을 즐기며 방탕하기는 해도 의기가 있는데다 호방한 영웅의 기질까지 엿보여 걱정은 덜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달랐다. 열여섯 살 적에는 왕방산에서 전신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사냥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성격이 잔혹했다. 그런데다 매사에 패기만만하고 욕심까지 많아, 만약 병약한 세자가 죽고 어린 원손이 등극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불길한 사단을 생각하면 가슴이 편치 않았다. 명철한 세종대왕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원손이 태어나던 날 신숙주와 성삼문에게 어린 아기를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록 이들의 지위와 벼슬이 낮지만 손자가 왕위에 오를 즈음에는 신분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그날 조회가 끝난 후 황희 황보인 김종서 정분 정인지 다섯 신하를 남으라 한 뒤 그들에게도 다시 아기의 후사를 부탁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충신들이었다. 세종대왕의 불길한 예감은 엉뚱하게도 원손이 태어난 바로 다음날 벌어졌다. 세자빈 권씨가 아기에게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종의 애달픈 운명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한지 2년이 지난 1452년 2월 그믐 무렵, 임금이 동생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대소신료와 20명의 집현전 학사들을 내전으로 불러 잔치를 벌였다. 왕의 가슴속에 있는 무거운 근심을 말하기 위한 잔치인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여흥이 무르익을 무렵 왕의 부름을 받은 아들 홍위, 즉 세자가 나타나고서야 문종은 입을 열었다. 비장하고 엄숙한 어조였다.


  “경들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오.”


  그런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평생 여기 모인 여러 현인들을 스승과 같이 공경하여라. 군신지분君臣之分이 있다 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 수양, 안평 등 여러 숙부가 있고 이 모든 현신이 있으니, 비록 네가 어리더라도 염려 없을 것이다. 오늘 내가 한 말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는 세자의 등을 만지며 눈물을 보였다. 그 자리에는 선왕이었던 세종의 부탁을 받은 신숙주와 성삼문, 그리고 정인지鄭麟趾도 함께 있었다. 그는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배운 스승이었다. 왕과 세자는 예를 다하여 그를 대했고 정인지는 왕의 눈물어린 부탁에 부복례로써 답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5월 23일 저녁, 문종은 다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 등을 불러 다시 한 번 더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顧命, 임금의 유언)을 남기고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문종 승하 후 일 년 반이 지난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의 신호에 따라 만고충신 김종서의 머리를 철퇴로 부순 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명을 가장하여 모든 대신들을 들라하고 입구에서 한명회韓明澮의 신호에 따라 차례로 사람을 때려죽였다. 한명회가 들고 있는 것은 살생부였고 살殺과 생生의 기준은 어린 단종을 감싸 안으려는 자인지 아닌지였을 뿐이다. 수양대군은 그날 밤 어린 시절 왕방산에서 노루나 사슴 잡듯이 사람을, 그것도 나라의 충신들을 때려잡으며 피칠갑을 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때는 자신의 옷에 피를 묻혔지만 이번에는 수하들의 옷에 피를 튀기도록 한 것뿐이다. 그때부터 권력이 안정될 때까지 죽인 사람의 숫자나 잔혹성은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모진 피바람이었다. 한 국가의 통치 시스템이 마비될 정도로 충신들과 그 후손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린 것이다.


  계유정난 다음날 조회에서 정난공신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들의 논공행상이 벌어진 것이다. 36인의 일등훈一等勳 명단 제일 첫 열에는 의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하동부원군 정인지, 고령부원군 신숙주......


  이들은 세종대왕과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천지신명께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이다. 그러나 정인지는 수양대군을 부추겨 피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신숙주는 계유정난 후 단종의 면전에 대고 퇴위를 주청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란 이유로 안평대군마저 거사 일주일 만에 죽인 주역들이었다. 그것도 안평대군이 양모養母인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더러운 누명을 씌워서였다. 성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아우였고 자식이 없어 안평이 그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양자와 양모가 ‘붙어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녀도 자살했다.


  그 난리로부터 4년여가 지난 1457년 6월 22일 아침, 창덕궁의 돈화문에서 한 무리의 가마 행렬이 동쪽으로 출발했다. 인솔책임자인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앞장서고 50명의 군졸이 호위하는 삼엄한 행렬이었다. 목적지는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淸泠浦,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남한강 뱃길과 이포나루를 거치고 원통고개를 넘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이미 2년 전에 삼촌에게 왕위를 넘긴 것도 모자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채 천리 길을 가야 하는 단종의 유배 행렬이었다. 출발한지 일주일만인 6월 28일에서야 청령포에 도착했다. 그곳은 삼면이 서강西江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험준한 육육봉六六峰이 버티고 있는 천혜의 유배지다. 단종은 그곳과 영월의 관풍헌에서 4개월여 동안 유배생활을 한 뒤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강물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밤에 몰래 건져 동을지산冬乙旨山에 암매장하고 돌을 얹어 표하였다. 바로 지금의 영월 장릉莊陵이다.

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 뒤로는 험준한 절벽이 병풍처럼 막고 섰다.
어린 단종이 묻혀 있는 장릉.

  단종이 유배를 가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두 차례에 걸친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여파였다. 1456년 6월에는 소위 ‘사육신’으로 지칭되는 충신들이 주도했고 이듬해에는 경상도 안흥으로 유배된 숙부 금성대군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어디에 있건 세상과 권력으로부터 고립되다시피한 어린 단종이 이에 개입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정인지와 신숙주는 이를 빌미로 그 어린 것을 귀양 보내야 한다며 편전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죽여야 한다고 울대 꿀렁거리며 더러운 침을 튀겼다.


  “노산군은 종묘사직에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또다시 역모를 꾀하여 어지럽힐 터이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정인지 신숙주가 주동이 되어 조정에 올린 계목啓目의 내용이다. 이에 마침내 10월 24일에 노산군을 죽이기로 조의朝意가 확정되었다. 단종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른 길을 거꾸로 따라 올라가보면 그 시작과 끝에는 항상 정인지와 신숙주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총애했던 세종대왕과 문종의 유언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이었다. 두 임금의 유언은 공히 ‘이 아이를 잘 부탁하오.’였다. 그들은 인면수심의 극치를 보여준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인물이었다.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정인지는 후일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 당했고 후손은 모두 죽어 손자 대에는 멸문滅門이 되었다. 신숙주는 변절자의 화신으로 낙인 찍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쉽게 상하고 잘 변질되는 ‘녹두 나물’의 이름이 ‘숙주나물’로 바뀐 것이다.

보고 있노라면 그저 애달프기만 하다.

  그의 고독을 숨죽이고 지켜봤을 청령포의 관음송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스친다. 그때도 바람은 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여로旅路에 지친 객들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향기로운 바람이지만, 그때에는 한양의 권부에서 발원된 피냄새 묻은 비릿한 바람이 열일곱 살 아이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괴롭혔을 것이다. 그 외로움과 적막함과 고통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매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두고 온 아내가 그리워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 앞에 서니 내가 애달프다. 그 잔혹한 일당들은 혹시라도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 두려워 후일 정순왕후로 복원된 부인 송씨와도 생이별하게 하는 악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또한 신숙주는 노비로 쫓겨 가는 정순왕후를 자신의 종이나 첩으로 삼도록 요구했다니 그들이 저지른 악행과 그들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과 사연을 다 적을 수 없다. 다만 이 시를 읊으며 죽어간 한 사람 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망향탑에서 바라본 한양 방면 전경. 매일 이곳에서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봤을 것이다.
담장 너머에서 본 단종 어소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죽은 사육신死六臣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이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붓을 들어 쓴 단가다. 세조는 삼문의 재능이 아까워 김질과 금부랑 김명중을 시켜 뜻을 돌리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조카를 쫓아내고 왕이 된 세조에게 ‘나으리’라고 조롱하여 불에 달궈진 인두와 부젓가락으로 배꼽이 지져져도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고 죽어갔다. 봉래산은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관풍헌이 내려다보이는 산, 그곳의 낙락장송이 되어 단종을 지키겠다는 그의 마음이 고결하다. 그는 고문을 당하던 중 세조 옆에 선 신숙주에게,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입직했을 적에 영릉께옵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때 너는 세치 혀로 천지신명께 맹세하지 않았느냐, 이놈아.’ 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열일곱이라...... 내 나이 열일곱을 겪어도 봤고 내 아들 열일곱을 지켜도 봤다. 그래서 열일곱의 그를 생각하면 가엾고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사람들이 참 모질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어도 권력의 맛은 여전한 모양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창 바쁘다. 쟁반 위에 올려진 떡이니 종래에는 누가 먹어도 먹기는 할 것이다. 모쪼록 애는 쓰되 모진 짓 나쁜 짓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 글의 대사 중 일부와 글의 맥락은 춘원 이광수가 짓고 이정서에 의해 편저된 2015년판 <단종애사>에서 인용, 참고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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