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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Dec 07. 2021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충무공을 생각하다

  그날은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이었다. 다만 <빼빼로 데이>에 묻혔을 뿐이다. 화면에는 백발 성성한 미국의 4성 장군이 연단에 올라 "안녕하십니까?"를 시작으로 참전용사들의 추모 연설을 하고 있었다. 유엔군사령관인 폴 러캐머러 대장이었다. 연설 막바지에 그는 놀라운 말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 중 하나인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경거망동하지 말고 태산처럼 침착하고 신중하게)을 말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처음 참전하는 옥포해전에서 장군이 군사들에게 내린 명령이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인물로 알려진 그는 장군의 동상 앞에서 항상 거수경례로 예를 표하는 군인이라고 한다.

  페루의 해군사관학교에는 자국 생도들에게 충무공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 정부에서 제작해 보낸 이순신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또한 미 육군 837수송대대 역시 장군의 군인정신을 기리고 그를 본받고자 부대 마크에 거북선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이순신, 전사 그리고 수호자>란 제목의 만화가 출판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견되어 이순신과 대립했던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 또한 장군의 전투능력과 인품을 황제에게 보고해 명으로부터 정1품 관직인 도독에 제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전사한지 4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충무공의 위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낮에는 물이 푸르고 밤에는 달이 밝은 한산섬'


  한산도閑山島는 임진왜란 당시 통제영統制營이 있었던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1,340일 동안 머물렀던 섬이다. 섬에 도착해 ‘승리를 만드는 곳’이란 뜻을 가진 제승당制勝堂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고즈넉했다. 맑은 바다 물결이 쉴 새 없이 찰랑대는 길옆으로 추색 만연한 산풍경이 굽이굽이 펼쳐진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가 달 밝은 밤에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했던 수루戍樓에 올라서니 눈앞에 펼쳐진 바다 풍경이 평화롭다. 400여 년 전 이곳 주변에 감돌았던 전운을 상상하기 어렵다. 오직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독하게 남긴 그의 기록, <난중일기亂中日記>만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에 걸쳐 쓴 1,595일치의 기록이며,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가 이 일기에 남긴 글자의 수는 93,022자이지만 인류 역사에 남긴 유산의 무게는 천금보다 더 무겁다.

장군은 이곳 수루에 홀로 앉아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며 숱한 날들을 노심초사했다.
400여 년 전 이곳에 감돌았던 전운을 상상하기 어렵다.

  “나는 대장이 되어 결코 적을 버리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임진왜란 막바지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에게 막혀 일본으로 탈출이 어렵게 되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에게 은 100냥과 보검 50구를 바치며 “길을 빌려주어 환국하게 해 주시오.”라고 했다. 진린은 이를 허락했다.’(난중잡록亂中雜錄 무술년 11월 19일 이전 기록)


  ‘뇌물을 받은 진린이 이순신에게 강화를 허락하라고 하자, 이순신은 “원수 일본군을 놓아 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다.(중략) 이에 진린은 이순신에게 “나는 잠시 유키나가를 버리고 먼저 남해의 적을 토벌해야겠소.”라고 하자, 이순신은 “남해인은 모두가 포로가 된 우리 백성이지 일본군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진린이 “이미 적에게 붙었으면 그들도 적이니, 오늘 토벌하면 머리를 많이 벨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자, 이순신은 “황상皇上께서 토벌을 명한 것은 우리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것인데, 이제 그들을 죽인다면 황상의 본의가 아니오.”라고 했다. 이에 진린이 노하여 “황상께서 내게 장검을 하사하셨소.”라고 하니, 이순신은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그러나 나는 대장이 되어 결코 적을 버리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라고 했다.’(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무술년 11월 16일 기록)


  진린陳璘의 겁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왜장倭將의 뒤를 쫓다.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선中船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갔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난중일기 무술년 11월 17일 - 마지막 일기)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일기를 읽고 책을 덮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뇌물을 받은 진린이 황상에게 하사받은 장검으로 목을 베겠다는 겁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왜장을 뒤쫓은 마지막 기록을 남기고 이틀 뒤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노량해전은 전세가 기운 일본군이 본국으로 퇴각하기 위해 500여 척의 군선을 투입한 필사의 철수 작전이었다. 명나라 수군은 비협조적인데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끝까지 이를 저지하기 위해 60척의 수군 전력으로 맞서다 사망했다. 그는 1594년 1월 12일 일기에, 어머니 초계 변씨가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분부한 그 말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장군은 줄곧 부상의 고통에 신음하며 전선을 지휘했다.


  <난중일기>를 읽어 내려가며 가슴 저몄던 것은, 장군은 전사할 때까지 줄곧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전쟁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초기 전투였던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왼쪽 어깨와 등을 관통하는 총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날 일기에, ‘나는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탄환을 맞은 부하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몸이 좋지 않아 ‘식은땀으로 옷을 두 겹이나 적셨다’거나 ‘밤새도록 신음했다’, ‘밤새 고통스러웠다’,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표현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특히 1597년 3월 4일 ‘왕명거역죄’로 투옥되어 고문까지 당하고 그해 4월 13일에 어머니의 부고訃告를 접한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된 듯하다. 급기야 4월 16일 백의종군을 위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어머니의 영구靈柩를 떠나면서는, ‘나는 지친데다 남쪽으로 갈 일이 급박하니 울부짖으며 곡을 했다.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그때부터 1년 7개월 동안 더 전선을 지휘하다 전사했다.


  “안위安衛야! 감히 죽고 싶으냐? 도망간들 살 것 같으냐?”


  <난중일기>에서 거의 매장마다 빠지지 않고 일관되게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는 군율軍律에 관한 것이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보름만인 1592년 1월 16일에 처음으로 ‘병선을 수리하지 않은 군관과 색리色吏(아전)에게 곤장을 쳤다’고 적은 이후로 병사들을 엄벌한 기록은 부지기수다. ‘박몽세朴夢世라는 자가 이웃의 개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거나 ‘음탕한 계집 12명을 잡아다가 처벌했다.’(1595년 6월 24일)는 등 군기를 해친 자는 남녀를 막론하고 처벌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일기 속에는 여러 번 군량을 훔친 자, 도주하거나 이적행위를 한 군사, 전투에 임해 머뭇거리거나 명령에 불복한 장수, 그리고 우리 백성을 우롱하거나 해코지한 왜적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는 엄중함이 곳곳에 서려 있다.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그의 추상같은 원칙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전쟁 준비 단계부터 수없이 작전회의를 같이 하던 장흥부사 배흥립裵興立까지도 직접 죄를 심문하고(1596년 1월 27일), 기한에 늦은 죄를 물어 강진현감 나대용羅大用과 가리포첨사 이응표李應彪의 처벌도 불사했다(1596년 2월 13일). 또한 명량해전에서 13척의 우리 수군을 포위한 133척의 적선 위세에 압도당해 머뭇거리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에게,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들 살 것 같으냐?”라고 일갈하며 공격을 명했다고 적었다.(1597년 9월 16일) 압도적인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숱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그의 비상식적인 전투 능력은 이러한 엄격하고 엄정한 군율이 기초되었기 때문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조의 오판, 나라를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리다.


  선조는, 원균元均이 장수로는 최고라며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을지라도 가벼이 논계해선 안 된다고 했다.(선조실록 1595년 8월 18일) 이에 반해 이순신 장군은 1596년 윤8월 24일 일기에 ‘元公行凶不錄’이라고 적었다. ‘원공(원균)의 흉악한 행동은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균에 대해 임명권자인 임금과, 같이 전쟁을 치르는 장수인 이순신 장군의 판단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1596년 겨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중첩자인 부하 요시라를 시켜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허위정보를 권율에게 흘렸다. 이 보고를 받은 선조는 즉각 출동을 명했지만 이것이 적의 간계임을 안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왕명거역죄’로 1597년 2월 26일 체포 압송되어 파직되고 원균이 대신 통제사가 된다. 그러나 원균은 그로부터 불과 다섯 달 뒤 칠천량 해전에서 군사를 함부로 움직였다가 왜군에게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조선 수군의 붕괴를 초래해 결국 남해의 제해권을 잃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온 나라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시발이 되었다.

  <난중일기>에서 원균은 120여 차례 언급된다. 대부분 그의 잘못된 품행과 처신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특히 1597년 5월 8일 일기에는 ‘元(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중략) 나를 훼방하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할 따름이다.’라고 적었다.

  선조와 이순신의 상반된 판단은 후대에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역사 드라마의 시청률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나, 당시에는 조선 수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후과를 초래해 국가를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충효忠孝와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


  <난중일기> 속에는 전선에 있는 장수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담은 사적인 감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장군은 제일 첫날 일기에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가눌 수 없다’고 적은 이후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안부와 걱정, 그리고 그리움을 숱하게 적었다. 특히 감옥에서 석방된 후 어머니의 부고를 접한 날에는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고 적어 읽는 이조차 애통함을 느끼게 했다.(1597년 4월 13일) 또한 ‘아내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없다.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1594년 8월 30일)고 적었고, 막내아들 면葂의 전사 소식에는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처럼 인자하지 못한 것인가.(중략)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중략)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다.’(1597년 10월 14일)고 썼다. 그로부터 약 일 년 후 장군도 세상을 떠났으니 이 또한 애통한 아비의 마음을 읽은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민愛民 정신


  장군의 자애慈愛로운 마음이 향했던 곳은 비단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농민과 어부 피난민, 심지어는 군영을 오가며 심부름하는 종들까지도 염려하고 걱정했다. ‘더위와 가뭄이 너무 심해 농사일이 매우 걱정된다.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리니 어찌 하늘이 백성을 가엽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1594년 6월 14일) ‘늦게 큰 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위로하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1596년 5월 6일)’ ‘어제 저녁에 종 금金을 본영으로 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거세어 걱정이다.’(1596년 1월 12일) ‘사내종 경京이 심하게 앓는다니 무척 걱정이 된다.’(1596년 7월 27일) ‘정보를 다 믿을 바는 못 되지만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 전라우수영에 전령을 보내 피난민들을 즉시 육지로 대피하도록 당부했다.’(1597년 9월 14일)고 적었다. 이처럼 <난중일기>에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무하려는 장군의 마음이 곳곳에 묻어 있다.


  <난중일기> 속에 스며 있는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군인정신, 인간애와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은 그가 단순히 용맹스러운 무장을 뛰어넘어 고결한 인본주의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진정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를 절제된 언어와 태산처럼 무거운 행동으로 명징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비좁은 지면과 내 알량한 지식으로 그의 공적과 인간됨을 다 적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더 알아야 할 것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시공을 초월한 우리 민족의 영웅임을 확인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이 소리 높여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칭찬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마터면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할 뻔했다. 자잘한 노략질 따위는 계산에서 빼더라도 일본은 두 번에 걸쳐 크게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에는 전국토가 유린당했으며 1910년의 경술국치에는 기어이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국토를 보전하고 주권을 되찾았다. 다만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가 일본을 이겼기에 나라를 보전했지만 1945년에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졌기 때문에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만약 그때 한 번이라도 일본이 이겼다면 우리말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애국가는 ‘하느님이 보우하사’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이순신은 일본의 와카자카 함대를 상대로 맞섰다.

  한산도에서 출항하는 마지막 배를 타고 통영으로 향한다. 비좁은 항을 빠져나오니 점점 바다가 넓어진다. 뱃전 오른쪽 저 멀리 보이는 좁은 해역이 아마 견내량見乃梁으로 향하는 길목일 것이다. 1592년 7월 8일, 그쪽에서 웅크리고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함대 70여 척을 이곳까지 유인해 갑자기 학익진鶴翼陣으로 에워싼 뒤 총통을 발사하는 장군의 거친 숨결과 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저 아래 바다 밑에는 그때 분멸 나포된 적선 59척의 잔해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그 위로 내가 탄 배가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손들은 충무공의 탄신일이 되면 해마다 한국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간 그가 후손들에게 남긴 회고록에 이렇게 썼기 때문이리라.

  '내가 제일 두려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흠모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그와 한 잔의 차를 같이 마실 수만 있다면 내 영지의 절반을 내놓겠다.'


<이 글에서 인용된 장군의 일기 내용은 2021년 3월 22일 출판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도서출판 여해 노승석 역주)에서 참고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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