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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키 Oct 12. 2022

내 영토의 배경은 동화와 소설이었다.

작가와 주인공들로 나를 치환하면서 형성시킨 내 마음의 지도

동네 너머 큰 도로가에 있는 수제 두부집에서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먹고 왔다. 가을 특유의 높고 맑은 하늘을 까마득히 머리에 이고서. 색에서 겨자색으로 익어가는 벼들의 이쁜 빛깔에 감탄의 눈길을 주면서. 집수리를 맡은 동네 아저씨와 택배를 부치러 간다는 그의 아내와 나, 이렇게 셋이서다.


낮에는 따사롭고 밤에는 서늘하다. 환절기 공기 변화가 신선하다. 바뀌는 계절도,  주변 자연환경에 드러나는 절기의  변화도,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묻게 만든다. 


5년 전 바닥을 쳤을 때, 다시 솟아오르려면 우선  나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급선무라 여겼었다.  그런데 겉햩기로만 했었나 보다. 지금 내가 더 낮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거 같으니 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오감과 언어로 세상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 현상들을 자신만의 삶의 태도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내면의 표상 (Internal Representation)을 만든다. 다른 말로는 "지도 만들기 (Mapping)"라고도 한다. 매 순간 자신만의 세상 지도를 그리면서 자신만의 현실을 만드는 거다.


마음 다부지게 먹고, 축적된 나의 세상 지도에 대해 꼼꼼하게 살펴보기했다. 지금이야말로 여러 면에서 나를 제대로 파헤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요즘 거의 동시에 내 주변 사람들에 의한 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다.


아일랜드에 있는 내 가족, 남편과 자식들에게 나는 망상증 환자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하나뿐이 없는 남동생에게는 현실성이 모자란 몽상가로 여겨지고. 그리고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전공 실력은 좋은데 현실적 능력은 약간 모자라는, 좀 딱한 사람으로 비치고 있는 듯하다.


대동소이하니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을 거다. 그래서 난 이들의 평가나 비난을 탓하거나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런 모습이 내가 세상을 향해 던진 나의 행동의 총합, 나라는 사람의 외면적 지도일 테니까. 그래서 별 반박도 하지 않고 그냥 그들에게서 거리만 두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골방에 나를 가두고 하루 종일 나를 살펴보는 일에 죄책감 하나도(?)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고마워하면서.  


지도에는 영토가 표기된다. 그 영토에서 나는  매 순간 나다운 언행으로 나와 세상 간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 든다. 매 순간의 나를 품고 있는 영토가 단계적으로 구체적으로 어찌 형성되었는지 그 특성을 살펴보는 건 자기 탐구를 위한 필수적 전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학위증 혹은 자격증으로, 호락호락 넘어가질 만큼 단순치 않다는 걸 청년 시절을 넘기면서 대충 알게 되는 듯하다. 더군다나, 정보 사회를 넘어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선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대학에서 배웠던 많은 지식들을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다 찾아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약간의 시간과 에너지만 투자한다면 얼마든지 아주 쉽게 세상살이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획득될 수 있는 게 지혜라고 한다면, 다채로운 경험의 영역들이 만재한 지금,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은 우리네 나이 든 사람들보다 더 명석하고 더 사려 깊은 지혜를 얻을 가능성을  수 있는 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가할 수  있겠다. 물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대 흐름에서 평생 학교만 다니고 공부만 많이 한 나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세상살이에 한없이 서툴고 계산 혹은 숫자 감각은 젬병이고 방향 감각도 없고 실질적 IT 기술도 별로 없는 내가 말이다. 더군다나 난 한 달 전에야 비로소 국적회복 신청을 해놓은  해외동포로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맥이나 네트워크는 제로에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난 한국에 기반이 없는 거다.  이런 내가 한국에서 뭔가 할 수는 있는 걸까? 그것도 무척이나 멋지게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꼼짝없이 골방에 처박혀 있게 만든 발가락 골절 사고다.


끊임없이 고개를 쳐드는,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 인지를 잠재우면서, 난 씩씩하게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열심히 몸으로 체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삶의 민낯을 겨우 보기 시작한 내가 여전히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말 그대로 뼈아프게 깨닫고야 말았다. 마당 한가운데 널린, 공사 자재 더미 사이에 발을 헛디뎌 오른쪽 발가락 뼈가 부러진 거다. 그것도 처음 3주간은, 목발만 사용하라는 의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간간히 발뒤꿈치로 움직거리다가 뼈 부러진 부위가 2밀리 더 벌어졌다는 엑스레이 결과를 보고서야 말이다.


나의 고질병(?) "어떻게 되겠지" 하는 무모함을 버리지 못했음을 절감했다. 이건 아직도 내가 5년 전의 충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구름 위를 걷듯 허공을 건너뛰며 살았던 이제까지의 나를 어이없어하면서 한심스러워하면서 난 여전히 같은 실수를 또 하고 있는 거다. 난 도대체 왜 이럴까? 나 스스로를 왜 자꾸 궁지에 몰아넣는지 그 이유를 진짜 좀 알아야겠다는 당위적 바람이 여느 때처럼 또 내 마음을 가득 차지했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이 상황이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너무 기묘해서 다른 해석은 불가했다.  


지상권이라는 조건으로 나온, 150년도 더 된 괴산 산골 한 귀퉁이의 폐가를 만난 지난여름은 내게 새로운 인생 서막의 징조 같았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난 결국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품고만 있었던 내 인생 학교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1년 2개월이 지난 지금 난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얼떨결에 토지 계약을 했고 나에게 커플 세션을 받던 부부의 지원으로 어렵게 집수리도 시작했다. 그게 문제였다. 옛날 집의 정취를 살리며 조금만 손을 보려던 것이 지저분한 벽을 사이딩으로 돌리다가 그만 공사가 너무 커져 버렸다. 아마도 나의 무지와 욕심 탓이었을 게다.  천정부지의 인건비와 두 배 가까이 인상된 건축자재비에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 와중에 나를 살펴보는 작업에 돌입하겠다는 건, 지금의 상황이 내 힘 밖의 것이므로 놓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정표를 어디쯤에서 놓쳤는지 알아내는 건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그걸 찾아내면 이제부터라도 내 갈길을 제대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켜켜이 쌓인 내 기억 속의 날들, 그 풍경들은 어찌할 수 없는 내 부분들의 집합체니까 그 길을 되짚어가 보려는 건 그런 관점에서 너무 타당한 결정이지 않을까 싶다.    


내 신념과 가치 서열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내 영토, 즉 배경에 마음에 눈길을 준다. 우선 떠오르는 장면은 늘 책을 붙들고 있던 어린 나의 모습이다. 심지어는 만화방의 기다란 나무 의자도 보인다. 그렇다. 내 삶의 태도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수없이 읽은 동화와 철들면서 섭렵한 소설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읽었던 잡지들에서 접한 사람들을 닮고 싶어 하는 바람에서 기인한 듯하다.


제한적 현실을 도저히 내 것으로 용납할 수 없어 스토리의 주인공들과 나를 동일시해 가며 얻었던 위로와 희망들이 나를, 내 언어를 형성한 것이 아닐까 싶은 거다. 그랬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나 작가들을 나로 치환하는 일은 언제나 재밌었고 내게는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위대한 작가들과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정작 내게 기여한 실질적 혜택은 재미와 용이성을 넘어, 현실의 궁핍과 잔인함으로부터 철저하게 나를 보호했던 거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정적 속성에 내가 함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들의 상상력과 낙관주의였다는 걸 최근에 더 정확하게 알아차렸으니까.   


난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로운 선택을 최고의 가치로 내걸고 삶의 관대함과 친철함에 한없는 경이감을 표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내 삶의 배경은 늘 소공자와 소공녀, 알퐁스 도데의 별과 황순원의 소나기, 샤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가슈똥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 속 사건이나 삽화들과 비슷하게 그려진 환경이었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은 또 다른 나였고 까뮈의 뫼르소는 감각적 삶을 구현시키는 용기를 내게 주었고 시몬느 보봐르는 고고함과 자유로움을 선망하게 만들었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은 채, 늘 그렇게 꿈꾸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었으니 삶의 구체적 모습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던 건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성향 탓인지 나의 사회적 문화적 시대적 인식에는 구멍이 많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라도 세상의 트렌드를 이해하고 그 흐름을 타고 가보려 한다. 늦게라도 시작하는 건 아예 시도조차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지속적으로 교류하다 보면 내 선택과 결정에서 내 뚝심의 이유가 정확히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희미하게 품으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변화는 냉정하고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고들 하지 않는가?  


학창 시절의 독서목록을 재확인하며 그때 사유하던 주제들을 다시 만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삶이 우연한 기회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스토아학파는 삶은 운명적으로 이미 예정된 구조 속에서 눈곱만큼만 의 일탈을 허용하는 가운데 진행된다고 믿는다. 나는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고 싶지 않아 두 학파 사이를 여전히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왔다 갔다 한다. 삶의 유한성에 겁먹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금 순간들을 천천히 살면서 삶의 퀄리티를 다듬는 기술에 오롯이 탁월해지길 기대하며 매진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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