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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키 Oct 12. 2022

한국살이의 숨은 동기

 의식적 자각 외에 아마도 무의식적 동기도 있을 거다.

2020년 7월, 하프 컨테이너에 유럽 앤틱 그릇과 앤틱 가구들을 싣고 이천 외숙모 댁으로 왔다. 내가 한국으로 그렇게 다시 온 표면적 이유는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직하게는 내가 태어난 내 나라에서 내 언어로,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그러나 아주 강렬한 바람 때문이었다.




2004년 4월, 마흔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대학 후배가 교통사고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거였다.


모든 면에서 나와 반대였던 그 후배는 대학 기숙사,  같은 방 후배의 친구였다. 서로의 지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보자마 죽이 척척 맞았었고 서로를 엄청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인생 굽이굽이마다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 참 편안한 그런 존재가 되었다. 삶의 풍요와 감사를 서로 확인하며 기뻐하던 후배였는데... 도대체 흠잡을 구석 하나 없었던,  내가 질투심 하나 없이 마냥 부러워하면서 이뻐했었던 후배였는데...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다니, 믿을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다.


그 열흘 전에는 내 유일한 한국인 학생을 교통사고로 아일랜드에서 잃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냐며 삶의 경이로움에 눈뜨며 행복해하던 그녀는 서른 중반을 막 넘기고 있었다.


만남 초기에  우리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서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타국에서의 삶이라는 환경이 서로의 다름을 엔간히 덮어주며, 나눌 수 있는 걸 극대화하는 묘수를 발견케 했었다.


내담자이자 트레이니였던, 아니 여동생 같았던 그녀를  남의 나라, 아일랜드 땅에 묻는 장례식은 내게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하나, 슴 통증은 가장 실재적이었다. 장례 기간 내내 허공에 발을 딛는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하기조차 어려웠다.


드라마나 소설 속 플롯도 토록 지독하게 구성되지  않을 듯싶었다. 내가 좋아하던 교황도 그 무렵에 영면하셨다. 그해 4월은 내게 그렇게 잔인했다.


가까운 두 사람의 죽음을 한국과 아일랜드에서 거의 동시에 갑작스레 맞이하고는 삶이 불현듯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 내린 결론이 내 나라를 잃고 살 수는 없다는 거였고 한국에 돌아와서 일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그로부터 3년 3개월 후, 2007년 7월 나는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왔다. 남편은, 와이프 열망을 잠재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고 곧 한국에 일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 아이들은 한국에 대한 경험을 얻을 수 있어 좋았고 나 역시 강의와 트레이닝 기회를 얻어 대단히 의욕적으로 일했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다가 2011년 7월, 우리 가족 모두는 한국을 떠났다. 아일랜드에 혼자 계신 시어머니에 대한 염려와  한국의 연금제도에 대한 불안감과 아일랜드에서 찾아온 남편에게 더없이 귀한 기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였다.


그 이후로 나는 거의 5년간을 매년 적어도 한 번 이상 한국을 방문해 특강과 트레이닝을 계속했었다.


2016년 4월,  동생 선거를 돕기 위해 왔다가 아예 내 거처를 준비하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로 했다. 서울 수서에 심리상담 교육센터를 열었고 몇 개월 후에는 특강차 방문했던. 제주도 영어교육 도시에 제주 센터까지 열게 되었다. 영어로 상담한다는 것과 제주의 낭만적 경관에 반해서 무턱대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2년 정도 무섭게 열심히 일했고 난 폭삭 망했다. 빚만 잔뜩 지고 2019년 5월, 기약 없이 한국을 다시 떠났다.




그동안 내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에피소드들을 난 늘 얼결에 저질렀다고 말해왔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내 선택은 언제나 내 속의 보이지 않는 드라이버(나를 나의 최고로 만들고픈)가 조정하는 방향성에 걸맞은 소망의 파편들이었음을 말이다. 달라진 점은 나의 최고가 어떤 건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내 속에서 관점을 달리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다.




2022년, 한 해 내내, 가까운 몇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는 현재 모습을 폄하하면서 내 삶의 방식을 비난하는 듯싶었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 더군다나 연고 하나도 없는 괴산 골짜기에서 이렇게 구질스럽게 청승을 떨고 있느냐면서 질문 아닌 질책을 한다.


이제는 대답 아니 변명하는 게 정말 싫어졌다. 내 기상을 깎아내리는 사람들과는 잠시 그리고 혹시 필요하면 영원히 결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들의 선한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데 쓸 정신과 에너지도 부족한 내가 그들의 비판에 더 이상 나를 방치할 수가 없어서다.


그들이 나를 공격? 할 수 있는 근거는 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았기 때문일 거다. 그걸 모두 끊어 버리기로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혼자 해보려 한다. 내가 작정하고 꼭 지켜야 할 일은 부채를 더 늘리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그렇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기도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독립적이라는 칭송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이 늦은 나이에 다시 독립을 선언하다니(혼자서지만) 이 무슨 아이로니인지...  


어쨌든 정말 중요한 질문은 "표면적 동기와 숨은 동기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한국살이를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다. 어디에 근거를 둔 건지 모르겠지만 내속의 대답은 예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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