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 관하여 -1편-
우울에 관하여
감정에도 깊이가 존재한다. 대개 깊은 감정 일수록 어둡고 잊기힘들며 얕은 감정일수록 휘발성이 강해 쉽게 잊힌다. 기쁨, 설렘, 웃음보다 슬픔, 아픔, 우울이 깊은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그중 가장 깊은 감정은 ‘우울’이라 생각한다. 감정의 깊이 즉, 척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마음의 병이 발생하는데 ‘우울증’은 대표적인 마음의 병 중 하나다. 그것에서 떠오르는 것들은 고요한 심해처럼 아주 어둡고 아주 깊다.
물은 무색투명한데 바다는 푸른 빛을 띤다. 얕을수록 청량하며 깊을수록 명도가 낮아진다. 그래서인지 ‘우울’이란 단어를 떠오르면 불 꺼진 방 천장이나, 별이 없는 밤하늘이나, 동해의 밤바다가 떠오른다. 사전적 의미로 ‘blue’는 우울을 뜻하기도 한다. dark ~, light ~, bright ~, deep ~ 등 수식어들을 붙여 111개의 ‘blue’로 구분하는데, 파블로 피카소의 푸른 시기(1901~1904)에는 따뜻한 색감이 거의 없는 파란색과 녹색만을 사용하여 우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blue’와 ‘우울’의 기원에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I'm blue”라는 문장을 한 소설가가 ‘나는 파란색이다’가 아닌 ‘나는 우울하다’란 뜻으로 사용했다는 설이다. 예컨대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번역했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처럼.
[“파란색이 우울을 상징한다면, 하늘도 바다도 파란색인 이 지구에서 우울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거네요. 그렇죠?” … 그리곤 “심지어 바다는 지구의 70%나 되잖아요.”하고 덧붙였다.]
책 우주의 방 ‘I feel blue’ 중에서.
수분은 사람 몸의 70%나 차지한다. 물은 무색투명하며 밤은 깊어갈수록 푸른 빛을 띤다. 자정쯤 되면 자연스레 우울감에 잠기기 쉬워진다. 겨울이 되면 밤의 길이는 늘어난다. 동지는 24절기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1년 중 우울이란 감정을 동반하기에 가장 좋은 날, 그쯤 되면 한 번씩 우울함에 아주 깊게 빠진다. ‘빠진다’라는 건 한 발 한 발 내딛다 가늠할 수 없었던 깊이 때문에 허우적대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 떠밀거나 밀쳐서가 아닌 온전히 내 감정으로 인해.
14년 12월 무렵, 우울증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우울함이 극에 달했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첫사랑과 헤어짐이었다. 첫사랑, 그 단어만으로도 얼마나 순수했을지, 얼마나 서투르게 사랑했을지 충분히 대변해준다. 처음이란 이름의 무게는 나에게 유독 특별하다. 외가, 친가를 합쳐 첫째 자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첫 아이가 바로 나였다. 내가 했던 모든 행동들은 그들에게 처음이었고 그들이 나를 대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의 서툶은 세 발에서 두발자전거로 갈아 탈 때와 비슷하다. 어떤 방법으로 알려줄 수 없고 감각적으로 익혀가야 한다. 그러다 몇 번이나 무릎팍이깨지고 깨지면서 포기하지 않아야 두발로 올라탈 수 있다. 살아가며 처음 겪는것들은 한없이 많았고 서툴은것들이 적어져가는게 어른에 가까워지는것이라 생각한다. 그중 사랑이 있었고 첫사랑의 끝에는 누구나 겪는 서툰 이별도 동반했다.
첫이별, 믿기지 않았다.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기억은 유리한 쪽으로 재구성된다. 우리였던 때부터 우리가 아닌 남이 될 때까지, 남에서 우리가 되는 과정과 우리에서 남이 되는 과정은 엄연히 달랐다. 두 개를 붙여 놓으면 하나가 되지만, 다시 하나에서 둘이 될 땐 떨어지는 것이 아닌 잘라내어야 한다. 그만하자. 짧고 굵게, 단단하며 차갑게 내리쳤다. 단번에 잘라내려 한 거겠지. 몇 번이나 내리치기엔 너무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을 테니. 그렇게 그 사람과 남이 되었다.
처음이 주는 설렘과 기쁨은 반대로 감당치 못할 슬픔이 몰려왔다. 그것을 사무치는 것이라 불렀던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리움은 고통스럽지 않지만, 그 순간들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믿기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과 나는 헤어진 게 아니라 어디론가 가버려 당분간 올 수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그 말 듣지 않았던 거라고. 그러다 연락이 올지 모른다는 기대도 하게 되었다. 걱정과 기대하는 것은 한 끗 차이지만, 둘 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걸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대는 실망으로 귀결되었고, 실망은 전보다 더 낮은 기대로 이어졌다. 낮아지는 기대치는 삶 전반에 깔렸고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똑같은 일상의 똑같은 반복일 거라 확신하는 삶. 정확히는 살아감에 의미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울이란 감정에 서서히 적셔가듯.
‘죽음과 죽어감’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5단계를 제시한다. [분노-부정-타협-우울-순응] 그중 4번째 ‘우울’ 단계이니 실제로 죽음에 다다랐다,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모든 생각의 끝 지점은 아래로 향했다. 수면 위로 떠 올라 숨 쉴만하면 또다시 심해 끝 지점까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서 헤엄치다 보면 그대로 죽음에 순응하게 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죽음 앞에 순응할지 발버둥 칠지 선택해야 했다. 지금껏 살아가는 걸 보니 다행히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