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감독 해본 적 있으시죠?"
"시험 감독이요? 네. 왜요?" 지금은 학교를 떠나 있지만 22년 동안 교사를 했으니 내게 시험 감독은 낯설지 않은 일이다.
"중등 임용시험 감독을 하실 수 있겠어요?." 단순 시험 감독이 아니라 중등 교사 선발 임용시험 감독이었다. 당황하는 내게 사전에 안내를 해주는 자리가 있을 거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나름 위촉이지만 사실은 차출이다. "아... 네." 어설프게 승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배짱이 또 버릇처럼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전 협의회 자리에 내가 진행하는 다른 업무가 겹쳐서 참여를 못했다. 중요한 시험 감독인데 내가 할 일들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으니 뭘 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나중에 전해받은 매뉴얼을 보니 127쪽에 달하는 얇은 책 한 권이다. 시험 하나 보는데 뭘 이렇게 책까지 만드나 싶었다. 들춰보니 시험 전반에 대한 내용과 각 교시별 시험 안내멘트, 정감독과 부감독이 해야 할 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쉽게 승낙해 버렸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감과 깨달음이 동시에 찾아왔다. 형광펜을 들고 내가 알고 있어야 할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을 했다. 읽어 내려가는데 매뉴얼 곳곳에 민원으로 제기되었던 사례들이 있어 바짝 긴장이 되었다. 시험 당일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시험 장소로 가다 거울을 보고 황급히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혹시 시험 감독 해보셨어요?" 당일 날 처음 본 부감독 선생님께 말을 건네니 자신도 처음이라 너무 긴장이 된단다. 정감독도 부감독도 둘 다 경험 없다니 큰일이다.
"괜찮아요. 잘 끝날 거예요." 능숙한 부감독에게 의지해서 하루를 버티려던 나는 근거 없는 위로를 하고 말았다. 시험 시작 벨소리와 함께 수험생 원서를 들고 자리를 돌아다니며 신분증을 확인하고 답안지에 감독관 서명을 해야 했다. 이게 또 긴장 된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뒤로 갈수록 한참 몰두해 있는 수험생들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책상 모퉁이로 답안지를 놔준 수험생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시험지 아래로 답안지를 둔 수험생이 많아 겨우 양해를 구하고 서명인지 낙서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내 이름 세 글자를 적어 넣었다. '내 이름을 이런 곳에 적어보게 될 줄이야. ' 다 끝나고 마네킹처럼 정면에 서서 시험을 감독했다. 너무 돌아다녀서도, 너무 한 곳에 있어도, 앉아서도 안 됐다. 어릴 적 선생님들이 벌로 일어서라고 했던 것이 왜 벌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60분, 90분, 90분 세 과목 시험이 모두 마치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험을 끝낸 수험생보다 감독을 끝낸 내가 저 멘트에 후련했다. 그런데 잠시 후 마지막 멘트 뒤로 갑자기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음을 따라가니 노래 가사가 머리에 켜진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괜찮아, 잘 될 거야. 우린 널 믿어 의심치 않아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임용고시까지 치렀을 그들의 하루가, 일 년 내내 혹은 그 이상 임용고시라는 수험생으로 살아갔을 그들의 삶이 감히 상상되어 목 한가운데가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혹자는 이 노래를 희망고문 노래라고도 하지만 수고했다는 말보다 어쩌면 이 잔잔한 노래가 그들에게 더 가닿았을지 모른다. 내가 감독한 그 교실에 있던 수험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이 나오기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기대일까. 올해 나도 합격의 운이 있었으니 내 기운이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전해지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