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어떤 약속도 없는 일요일. 원 없이 미뤄둔 책도 읽고 어제 새로 도착한 차도 내려 마시면서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던 중 카톡이 울렸다. 반가우면서도 반가워서는 안 되는 연락이다. 5년 전까지만 내게 가족이었던 분. 아이에게는 할머니, 내게는 예전 시어머니의 연락이다. 김치를 담갔는데 가져다주고 싶다며 시간이 되냐고 물으셨다.
이제는 더 이상 나와는 아무 관계가 아닌 분이지만 아직도 나는 어머니라 부른다. 나와 아이를 아껴주셨던 분이다. 시어머니라기에는 너무 가까운 사이였고 아이의 유년 기억은 할머니와의 추억이라고 할 정도로 아이를 정말 아껴주셨다. 집안일과 육아에는 전혀 관심 없고 무책임했던 아이 아빠의 빈자리를 어머니가 채워주셨고 나를 많이도 도와주셨다.
지역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어린이용 피아노를 중고로 팔길래 전화해서 샀다면서 복권에 당첨된 듯이 좋아하시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대학원 공부로 일주일에 2~3번 어린이집 하원과 저녁 돌봄을 부탁할 때도 싫은 내색은커녕 내가 걱정할까 봐 중간중간 웃음꽃 가득한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주셨다. 어느 날엔가는 학교 일로 주말에도 출근할 일이 생겼다. 허겁지겁 자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찾아갔을 때 아이를 두고 서둘러 출발하려는 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다시 차로 뛰어오신 어머니의 손에는 당시 내가 좋아하던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아이의 유년과 내 30대에 행복한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의 반 이상은 어머니에게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가족이 아니니 어머니라고 부를 필요도 없고, 더 이상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주변의 조언도 많다. 그들의 말이 맞을 것이다. 머리로는 멀어져야 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멀어지고 싶지 않아 끈을 여전히 잡고 있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고 살뜰히 어머니의 생신을 챙기고, 맛있는 음식과 차를 대접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아이와 자주 가던 그 집에는 더 이상 갈 수 없다. 어머니도 사실 같은 마음인 것 같다. 더 잘해주고 싶어도 아이에게도 더 만나자고 하고 싶어도 아이의 생일에 집 앞으로 와서 용돈을 쥐어주고 가시는 게 전부다. 더 이상은 서로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김치를 가져다주시러 온 할머니를 위해 아이가 내려가서 받고 올라오기로 했다. 아이의 손에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던 빵 한 봉지와 사과 한 박스를 챙겨서 내려보냈다.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 김치 한 박스가 들려있었다. 뚜껑을 열어보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만든 김치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평소 굴을 좋아했던 나를 위해 통통한 굴을 듬뿍 넣은 김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인연은 지키고자 해도 지켜지지 않는 인연이 있다. 더 잘해주고 싶어도 잘해줄 수 없는 인연. 사회적 관계라는 틀이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말라고 한다. 더 이상 내게는 어머니가 아니기에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고 안부를 편히 전하고 물을 수도 없지만 항상 건강하셔서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커가는 모습을 바라봐주시길 바라게 된다. 아이를 그렇게 잠깐 만나시고 돌아가시던 길 아이가 전보다 더 멋져졌다며 카톡이 왔다. 카톡을 보니 자주 어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말이 떠올라 오늘도 눈물이 난다. '잘 키워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