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 수업으로 아이는 집에 있고 나는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 아이가 아직도 어젯밤 본 축구 국가대표 경기의 후유증으로 한 번에 일어나지를 못한다.
몇 번을 깨우고 "엄마 간다." "응" 하고도 뒤돌아 보면 다시 잠을 자고 있다. 원격수업을 해야 되는데 걱정이 되어 한번 더 한번 더 말하니 급기야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내가 알아서 한다고, 일어날게!" 하며 버럭 성질을 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럴 때 화를 내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다. 이럴 때는 그냥 아이를 믿고 전략적 후퇴를 감행해야 이기는 것. 그렇지 않으면 아이와 나 사이에 필요치 않은 날 선 말, 모난 눈빛 대회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근을 했는데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원격수업에 들어오지도 않고 선생님의 전화를 받지도 않아서 걱정돼서 연락했다는 담임선생님의 메시지가 왔다. 아차 하는 마음에 아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아이는 역시나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지만 기다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길 30분 뒤 아이의 카톡이 왔다.
엄마, 나 망했어.
이제야 일어났어.
ㅠㅠㅠㅠㅠ
아이는 친구들에게 창피하다며 2교시부터 어떻게 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들어주는 것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이는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행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내게 어떤 감정을 주는지를 몸소 느껴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부모가 언제나 로열로드를 깔아줄 수는 없는 법, 스스로 곤란한 상황에 대처도 하고 상황을 극복하는 연습을 오늘 했을 것이다.
사춘기에 아이가 들어서니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어떤 것을 해줄까? 보다 어떤 말을 해서는 안될까?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될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아이를 챙기는 것이지만 잔소리가 될 수도 있고 나는 호의였지만 아이에게는 호의가 아닐 수도 있었다. 과한 칭찬이나 과장된 반응, 지나친 관심도 사춘기 아이에게는 도리어 독이다. 아이도 아이의 수준을 알기에 근거 없는 칭찬은 오히려 자기를 놀린다는 기분을 받기도 하며 과장된 반응과 지나친 관심은 자신을 어엿한 청소년으로 받아주지 않음으로 불편해한다.
사춘기 아이를 둔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번 경험을 통해서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것인 듯하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바틀비, 2008)에서 저자는 태양에서 빛이 난다는 것은 태양의 질량이 줄어든다는 것으로 태양에서 빛이 날 때는 더 많은 것을 가져가서가 아니라 자기의 것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처럼 지금 나는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점을 과감히 내려놓고 아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시기인가 보다. '바라지 않아도 바라는 대로 큰다'라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더하기보다는 아이가 건강하게 홀로 설 수 있게 빼기를 하나씩 해야겠다.
우주의 멀리 있는 은하들도 적정 궤도를 따라 서로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가 아이만의 궤도를 돌 수 있도록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돌아서면 언제나 거기 서있어 지켜봐 주는 일. 그게 전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