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못해서 고마워

12살 지구인 이야기(15)

by 도토리

몇 해 6학년을 담임을 해 온 후배가 부모님들과 2학기 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말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후배는 "다른 부모님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하신다"며 부모님들께 말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상담받은 양 괜히 안심이 됐다. '다들 그러는구나.'


내 아이 역시 5학년 2학기가 되더니 달라졌다. 사춘기에 접어든 내 아이가 가장 많이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이유 없는 짜증이다.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느닷없이 짜증을 낸다. 내가 보기에는 날이 좋아서 짜증, 날이 나빠서, 배가 고파서 짜증, 월요일이어서 짜증. 난데없이 듣게 되는 짜증은 나를 향한 말이 아님에도 여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다. 심한 경우는 '내가 엄마인 것이 짜증이 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매번 기다려주기로 마음을 먹지만 피로한 엄마는 기다려주기 힘들 때가 있다. 짜증이 유난하다 싶은 어느 날이었다. 아이의 짜증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말을 했다.


"엄마가 너에게 이유 없이 짜증 낸 적이 있니?"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주저 없이 내 머릿속에는 내 힘듦을 아이에게 털어냈던 순간들이 펼쳐졌다.

'아, 이건 질문이 잘못됐어' 말을 하고 후회를 했는데 조용하던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니. 엄마는 그러지 않아."

"짜증이 날 수 있어. 그렇지만 이유 없는 짜증은 엄마도 널 도울 수 없게 만들어. '에이 짜증 나.'가 아니라, 어떤 일로 짜증이 나는지 이야기하고 네 불편함을 표현했으면 좋겠어."

아이는 그 뒤로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도 조금씩 자기의 이유를 표현해주려고 노력했다.


"엄마, 나 지금 생각하고 있는데 자꾸 물어보니까 방해받고 있는 기분이야. 질문하지 말아 줘."라는 표현을 했다. 물론 말투나 태도는 여전히 짜증 모드였지만 아이는 이유를 이야기해줬다. 설령 이유 없는 짜증을 내더라도 반드시 몇 시간 뒤 혹은 자기 전 내게 "아침에 그렇게 해서 미안해."라고 사과를 했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도 만만치 않은 짜증쟁이다. 오히려 나는 아이가 그간의 이유 없는 나의 짜증을 기억하고 있지 못해서 고맙다. "엄마 닮아서 그렇잖아!"라는 말을 해도 사실 할 말이 없다. 나의 짜증은 얼마나 이유가 납득이 될만한 것이었을까?

부끄럽지만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의 짜증도 내 짜증의 거울은 아녔을까?


짜증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뜻이 '마음에 꼭 맞지 아니하여 발칵 역정을 내는 짓. 또는 그런 성미.'라고 나와 있었다. 짜증이라는 말의 뜻을 되새겨 보니 짜증은 자신의 기준에 맞게 상황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심리가 아닌가 싶다. 나는 항상 무엇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완벽한 아이, 완벽한 나, 완벽한 학교, 완벽한 가족.


완벽함이 아닌 충분함에 감사한다면 짜증은 줄어들지 않을까?

나부터 이유 있는 짜증을, 마음에 꼭 맞지 않아도 내 앞에 놓인 충분함에 감사해야겠다.


아이와 삶을 함께 하는 경험은 나와 아이를 성장시키는 영양소임이 틀림없다. 나는 더 많이 실수하고 더 많이 깨달으며 아이와 함께 계속 성장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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