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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Apr 19. 2022

제주, 바리메오름

오름을 오르다 보면 기대보다 너무 좋아서 밑줄 하나 긋고 싶은 오름들이 있다. 새별오름, 송악산, 절물오름처럼 유명세는 없지만 알고 보면 꽉 찬 오름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바리메 오름을 뽑을 것이다.


이리로 가면 뭐가 나오나 싶은 비좁은 외길을 운전 가다 보면 어느새 바리메 오름 입구에 도착한다. 한걸음 내딛으려는 그 순간부터 오르막길이다. 한 명이 거닐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계단의 너비와 높이가 다른 나무 계단들이 이따금 불규칙하게 놓여 있어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이 좁은 계단길을 따라서 정상까지 가는 길에는 볼거리가 어느 오름보다도 많다. 한라산 등반 때나 보이던 제주조릿대가 무성하고, 봄이 되어 피어 있는 풀꽃들을 알아채느라 마음이 바쁘다. 오름 기슭에서 지난번 붉은오름에서 처음 보았던 낚시제비꽃이 곳곳에 있어 반갑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안 봤던 새로운 풀꽃 하나가 피어 있다.

찾아보니 현호색이라는 이름을 지닌 풀꽃이다. 줄기 하나에 예닐곱 개의 꽃들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름에서 만난 풀꽃들은 정말 작다.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무릎을 낮춰 고개를 한참 꽃에 가까이해야 볼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이 풀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는 말은 어쩌면 자세히 보아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풀꽃들은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면 모두 아름다운 꽃들이다. 내가 여태 꽃 본 오름의 풀꽃들은 크기도 작고 길가에 불규칙하게 흩뿌려져 지듯 피어 있어서 한 번에 그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하지만 잠시만 키를 낮춰 바라보면 그 조그마한 잎이 가진 색과 앙증맞은 잎에 웃음이 절로 인다. 떨어진 나뭇잎과 풀들 사이사이에서도 자리를 잡고 삐죽이 올라온 꽃들은 오르는 내내 만날 때마다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오름 정상에 오르면 막혔던 시야가 뚫려 늘 뭔지 모를 벅참이 가슴에 차오르는데 바리메 오름의 정상은 '우와!' 외마디 감탄사를 여러 차례 내뱉게 된다. 가는 날이 날씨가 좋아서 남동쪽의 한라산과 주변 오름들, 서쪽의 송악산 한림, 애월까지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또 한 번 셀프 360 카메라가 되어 빙그르르 제자리에서 돌아본다. 산 아래 넓고 푸른 초지는 하나의 보너스와도 같았다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그 자리에 잠시 앉아서 오름 정상을 즐겼다. 잠시 눈을 감으면 제주에서나 느낄 수 있는 투박하면서도 강한 바람이 뺨으로 먼저 느껴지고 눈을 감으면 바람소리가 오름 아래서 듣는 소리와는 다르다.

지리산 꼭대기라도 올라가서 중계하는 아나운서라도 되는 것처럼 "저는 지금 바리메 오름에 있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유쾌한 기분마저 든다.

정상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가는 길에 예쁜 철쭉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직도 꽃봉오리만 가지고 있는 꽃과는 달리 활짝 핀 철쭉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입구에만 풀꽃들처럼 조금 피었나 싶었는데 발걸음을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철쭉꽃이 길가 양쪽 가득 피어 설레기까지 한다. 마치 그런 꽃들을 환대라도 하듯이 두 팔을 내뻗게 된다.

"꽃이 이렇게 봉오리에서 피는 거라고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다." 같이 간 친구는 또 선생님 모드로 한마디 거든다.


모든 오름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나의 오감을 살려내 준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광합성의 색깔과 꽃들로 눈이 살아나고,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가 살아나고,  어디서 누가 내는지 알 수 없는 바스락 거림에 무뎌진 말초 신경마저 살아난다.


오름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건물들과 늘어나는 차, 사람들에게 같이 갔던 친구가 한마디 한다.

"자연에서 이제는 로그아웃 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제주에 살면서 매주 자연에 로그인할 수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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