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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May 16. 2022

한라산 더하기 바다

제주, 고근산

고근산.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내게도 낯선 오름이다. 서귀포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오름 중에 하나란다.  대 도로변에서 북쪽으로 난 다소 경사진 길로 들어서니 오름 바로 입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었다. 오름 입구에서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범섬이 보인다. 푸른 나무들과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섬, 섬에서 보는 섬은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여기서부터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이 오름 좋을 것 같다.'

고근산 입구에서 정상으로 이르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녹음이 짙은 숲길을 걷는 느낌이 좋아 숨을 더욱 깊게 들이마시게 된다. 아침부터 무겁고 멍했던 내 머리가 맑아져 옴을 느낀다. 오르는 길에 하늘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위를 쳐다보니 저 위에서 꽃잎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꽃잎을 받아보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그래도 숨을 죽이고 위를 쳐다보니 뭔가 신비로운 기분이 나를 감싸는 순간이 찾아와 이미 꽃이 내 손에 놓인 느낌이다.

고근산에도 봄 빛이 깊어 다양한 들꽃들이 피었다. 다른 오름에서는 드문드문 볼 수 있었던 엉겅퀴가 오름 정상에 가득했다. 날카로워 보이는 잎사귀와 꽃잎이 도도하지만 색깔이 예뻐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오름에서 이렇게 꽃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거친 환경에서도 보란 듯이 꽃을 피워 한 계절을 즐기는 모습이 어여쁘다.

매번 오름을 오를 때마다 정상에 다다를 즈음이면 몸속 깊이 보관해둔 엔도르핀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어떤 멋진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질지 기대감이 들기 때문이다. 오름은 정상에 올라서야만 그 오름에 대한 느낌을 정리할 수 있다. 항상 그 웅장함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작음을 깨달으 겸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을 잘 담아보려고 노력한다. 간혹 눈도 감아서 새소리도 들어보고 바람도 느껴본다. 그것만으로도 평온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고근산은 눈을 감기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나 웅장하다. 비현실적이라고 할 만큼 남쪽으로는 한라산의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5월의 한복판에 있어서 일까 푸른 녹음은 한라산을 빼곡히 채우고도 남아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사진으로 담아보지만 그 웅장함은 쉬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 색은 또 왜 이리 다양한 한라산을 연하고 진한 초록색들이 채운다. 종도 모르는 연한 나무들이 이루는 긴 군락은 초록 용암이 흐르는 것 같다. 아마 한라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멋지게 볼 수 있는 오름을 택하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고근산을 택할 것이다. 한라산 풍경에 흠뻑 빠져 남쪽으로 몸을 돌리면 서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오름은 정말 소위 말하는 마운틴 뷰, 오션 뷰를 다 가진 오름이다.


하지만 최고의 풍경은 역시나 사람이다. 행복한 삶이라는 그림에는 언제나 사람이 풍경이 된다고 한다. 이런 오름도 혼자 보다는 함께 생각을 그 자리에서  나누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제주에는 오름이 368개나 있다지만 쉽게 오를 수 없는 오름도 많다. 외진 곳에 있기도 해서, 인적이 드물기도 해서, 가는 길이 쉽지 않아서 등  혼자서 선뜻 가기는 어려운 곳이 더 많다. 특히 나 같은 겁쟁이들은 혼자서는 꿈도 못 꿀 오름 나들이에는 누군가 있어야 하는데 매번 선뜻 나서 주는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야. 이곳은 나 혼자서는 무서워서 도저히 못 오겠다." 오름을 오를 때마다 늘 내가 버릇처럼 내뱉게 되는 말 중 하나이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같이 오름을 오르고 내려와서 맛있는 것을 사 먹고 돌아오는 평범한 주말이지만 그 안에서 자연으로, 사람으로 많은 에너지를 받아 다가오는 한 주를 생기 있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조급했던 마음들은 그 자연과 사람과 함께 잠시 쉰다. 오름을 오른다는 것은 내게는 어쩌면 은혜다. 자연이 주는 은혜 더하기 사람이 주는 은혜. 이런 은혜 앞에서는 착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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