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말고 둘이

13살 지구인 이야기(44)

by 도토리

요즘 집을 연일 정리하고 있다. 정확히는 책꽂이의 책들을 비워내고 있다. 아이는 언제나 우리 집은 책만 정리하면 커질 거라는 소리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다. 먼지 묻은 책들을 털어내며 나눠줄 것들이나 중고 판매, 가지고 있을 책들로 구분하다 보면 한나절이 지나간다.

의외로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될 오래된 티켓, 다 푼 문제지, 연수 자료, 오래된 책들이 그득해서 버리는 양도 꽤 많이 나온다. 어제는 종이류를 버릴 수 있는 화요일이라서 한 곳에 모아 혼자 버리려고 보니 당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양이다. 아이에게 SOS를 요청했다.

"이거 다 버릴 거야?" 놀란 아이의 눈이 커진다.

"응. 한 번에 안 되겠지?" 대형마트 쇼핑백에 나눠 담으니 2개씩 2번 다녀오면 될 양이다.

그렇게 늦은 밤 아이와 함께 책들을 들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그렇게 조용한 밤거리를 책 한 뭉치씩 들고 가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엄마가 너 어릴 때는 이렇게 너랑 같이 못하니까 어떻게 했었는지 알아?"

"정말 조금씩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었어."

"아빠는 뭐하고?"

"아빠는 늘 엄마 옆에 없었어. 그러니깐 혼자 바보같이 그랬겠지."

13살밖에 안된 아이를 앞에 두고 과거 신세 한탄이 나와버렸다.

"너무했네. 도대체 잘한 게 뭐야?" 아이는 무작정 엄마 편을 들어준다.

"그러게 엄마는 이제 생각하면 왜 그렇게 혼자 다 하면서 바보같이 살았나 몰라."


언젠가 사주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희생'하고 남을 키워주는 사주라고 한다. 흙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잘 자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란다. 그런데 정작 제 것은 제 때 누리지 못하는. 남 좋은 일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러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갔었는데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참 그런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늘 양보하고 이해하고 나하나 손해 보면 되었고 인간관계에서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 그냥 참는 일들이 많았다. 평생 부탁이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고 남의 부탁은 내 일을 제쳐두고 해주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내가 그렇게 하든 하지 않든 내 옆에 남을 사람은 여전히 남아있고 떠날 사람은 떠났다.


요즘은 일부러 어떤 판단을 할 때 나를 먼저 생각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먼저가 아닌 내 감정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사랑을 먹고사는 사람이기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언제든 사랑해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나는 관심을 좋아하기에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떼를 써볼 것이다. 뭐든 혼자서 척척해온 슈퍼우먼이 아닌 세밀한 나의 감정을 존중하며 건강한 인간관계를 꿈꾸고 있다.


"이젠 내가 있잖아. 내가 다 도와줄게!"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용하던 아이가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어느새 커서 자기에게 기대라며 말하는 아이에게 뭔가 골든티켓을 받은 것처럼 요구 사항을 쏟아냈다.

나중에 어른되면 엄마가 이모랑 맥주 한잔해서 늦게 귀가할 것 같으면 차 운전해서 데리러 와라, 엄마 출장 가면 공항에 데려다줘라 등등. 기다렸다는 듯이 요구사항을 쏟아내는 나를 보고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아이는 웃는다. 앞으로 더 자주 아이에게 혼자 말고 둘이 같이 하자고, 엄마 도와달라고 많이 많이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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