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역대급 태풍이 분다고 하던 날. 바닷가 근처 집이라 뭐라도 대비를 해야 될 것 같았다. 창틀에 끼울 단단한 종이를 찾다 보니 책장 가장 높은 곳에 빈 상자가 하나 보였다. 의자 없이 까치발을 하고 꺼내보려고 했더니 닿을 듯 말 듯 상자와 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자칫하다가는 책장의 책들이 쏟아질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 뒤로 돌아 의자를 가지러 가려는데 아이가 방에서 나왔다. 오늘따라 커 보이는 아이에게 별 기대 없이 이걸 꺼낼 수 있겠냐고 말을 했다.
"왜? 손이 안 닿아?"
아이는 그렇게 내 앞으로 걸어와 까치발을 하고 손을 상자에 뻗더니 한 번에 상자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우와! 너 나보다 이젠 진짜 크구나!" 아이도 나도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면서 눈이 커진다.
"봤지? 나 이제 엄마보다 커." 엄마보다 자기가 크다는 사실에 신나서 활짝 웃었다.
6학년이 되면서 키가 쑥쑥 크더니 연일 내 옆으로 다가와 키재기를 하고 냉장고에 플래그를 붙여가며 자신의 키를 표시하던 아이가 드디어 나보다 키가 컸다는 것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커가는 아이는 마음도 커가고 있다.
지난 여름 아이와 쓰레기를 버리고 오다가 이런저런 삶의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일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로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아이는 내가 빨래를 돌려놓으면 스스로 꺼내서 널기도 하고 빨래를 거둬들여 개기도 한다. 어느 날엔가는 수건을 너무 예쁘게 개어놓았길래 이건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거 유튜브에서 개는 법 찾아봤어."
빨래 잘 개는 법을 유튜브로 찾아보는 아이라니.
어느새 커서 내 삶의 짐들을 하나씩 나눠해주고 있는 아이를 보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오늘 같이 쓰레기 배출 요일제에 맞춰 모아둔 쓰레기를 버리러 함께 갔다. 나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들며 앞서는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아이가 돌아오는 길 골목길에서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았다. 도톰한 아이 손의 온기가 하루 동안 내 마음속에 쌓였던 날 선 감정들을 가다듬고 희석시켜줬다.
마침 도로 바닥에 아이와 내가 손을 잡은 모습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건 찍어야 돼!"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아이에게 그대로 있으라며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니 아이는 나의 행동에 웃기만 한다.
"엄마 나 이제 크니까 쓸모 있지?"
"쓸모 있다마다!"
이렇게 내 삶은 아이의 날실과 내 씨실이 얽히며 추억이라는 무늬를 오늘도 만들어가고 있다.